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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은 디지털시대 가장 잘 맞는 미학입니다”
한겨레 구본준 기자 임종진 기자

인터뷰/‘내가 나를 못말린다’ 펴낸 전각 작가 정병례씨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는 우리를 포위해버렸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알든 모르든 우리는 정병례(59) 씨의 작품을 생활 속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다. 영화 <노는 계집 창>과 애니메이션 <오세암>, 텔레비전 드라마 <왕과 비> <명성황후>의 제목 글씨는 그가 새긴 전각으로 찍어낸 것들이다. 그가 디자인한 책 제목 글씨는 훨씬 더 많다. 국문학자 정민 교수의 베스트셀러 <미쳐야 미친다>가 정씨의 강렬한 글씨 덕택에 판매가 더 늘어났던 일은 유명하다. 그 외에도 <하비로>를 비롯해 많은 책이 정씨의 전각글씨를 표지에 내세웠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보통 사람들이 정씨의 전각을 생활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바로 지하철 플랫폼에 걸린 서화액자 ‘풍경소리’에서였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바로 그 그림들을 그린(정확히는 새긴) 이가 정씨다. 우동체인점 ‘용우동’의 심볼마크도 그의 작품.

정씨는 현재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전각 작가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해도 생활 속에 공기처럼 존재하던 여러가지 전통 문화들 가운데 사라져버리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지만, 전각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일반인들의 삶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전통 회화와 문자향이 사라진 탓이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정씨는 전각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디지털 시대에도 전각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정씨는 최근 돌꽃을 피워온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쓴 책 <내가 나를 못말린다>를 펴냈다. 여러 책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가 정작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책에서 정씨는 담담하게 오랜 세월 홀로 감수해야 했던 아픈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정규학교는 중학교까지만 다닌 뒤 정씨는 오로지 전각이 좋아 예술을 진로로 삼아 자기 삶을 개척해오면서 마음고생이 워낙 많았던 탓이다. 전각을 ‘도장파는 일’로 업신여기는 시선에 수모도 많이 당했고, 실제 자신도 도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정씨는 “정말로 털어놓고 싶은 울분이 많지만, 가능하면 그런 걸 다 빼고 썼는데도, 투정한 것 같아 쑥스럽다”며,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정신적 작업노트”라고 책을 설명했다.

“전각은, 돌에다 모양을 새겨 물질에 정신을 담는 거예요. 그런데 그리기, 쓰기, 새기기 가운데 새기기가 가장 본질적입니다. 새기는 것 만이 입체가 되거든. 도장 크기의 그 작은 돌 안에 수직, 수평, 원, 모, 각이 모두 들어가서 소우주가 되는게 바로 전각이지요.”


정씨는 전각의 그런 특성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더욱 디지털 시대에 적합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전각은 점, 선, 면만으로 입체를 만들고 그걸 다시 2차원의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가장 간단한 모양으로 이미지를 해석해 삼라만상을 풀어내는 게 디지털시대의 미학과도 맞아요. 이미지나 아이콘의 원형질을 만날 수 있는거지요. 젊은 분들이야말로 전각이란 세계와 한번 새롭게 만나보시기를 권합니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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