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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내의 무소유 실험, 세상으로 넓히고 싶다”
- 18년 보금자리 ‘산안마을’ 나온 유상용(농학 82) 회원을 만나다 -
 
 
임은경(농학95,선구자취재기자)
 
인터넷에서 '산안농장' 또는 '산안마을'을 검색하면 수많은 게시물이 뜬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산안농장은 항생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고급 유정란 생산지로 입소문이 퍼진 곳이다. 이곳의 닭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좁은 우리에 갇혀서 '알 낳는 기계'로 혹사당하는 대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마음껏 모이를 먹고 건강한 계란을 낳는다. 가격은 일반 계란보다 2~3배 비싸지만, 한번 먹어본 이들은 십 년, 이십 년, 평생 고객이 될 정도로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하지만 이 마을이 주목을 받는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마을 전체가 한 가족이 되어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독특한 생활 방식이 그것이다. 마을의 정식 명칭은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 일본인 농부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巳代藏·1901~61)가 제창한 ‘무소유 공용 일체 사회’라는 이념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산안마을의 남다른 삶의 방식은 각종 매체를 통해서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적이 있다. ‘모든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쓰일 뿐’이라는 생각 하에 각자 가진 것을 풀어 내놓아 모두 함께 사용하는 마을. 때문에 ‘내 소유물’은 없지만 오히려 쓸 수 있는 물건은 더 풍성해지는 곳. 분업?협동을 통해 공동 생산한 계란을 팔아 마을을 함께 꾸려가고, 마을 내에서는 돈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외부로 나갈 일이 있을 때는 공동 지갑에서 필요한 만큼 꺼내다 쓰는 곳.
그런데 많은 이들이 동경하고, 가서 살아보고 싶어 하는 이 ‘유토피아’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온 사람이 있다.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18년 동안 산안마을 주민이었던 유상용(농학 82) 회원. 그가 지난해 6월 가족과 함께 산안마을을 나온 것은 그곳의 이념을 세상에 더 널리 퍼뜨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산안마을에서의 삶은 행복했어요. 괴로운 고비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것이 싫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그곳이 내 자리였으니까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움은 어느 정도 따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즐거운 일들도 많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정말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람의 행복에 관한 가장 이상적인 것을 함께 했으니까요.”
 
한국에 야마기시즘이 소개된 것은 60년대 후반이고, 실제로 산안마을이 시작한 것은 1984년부터다.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50여 곳에 퍼져있는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들은 종교에 근거하지 않은 공동체 중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례로 꼽힌다.
야마기시즘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대척점에 서 있다.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할수록 성공한 것이라 여기는 물질 만능주의 세상. 그러나 야마기시즘은 욕심껏 움켜쥔 그 손을 놓고 무소유의 자유를 누리라고 가르친다.
 
“야마기시즘의 근본 사상은 세상 만물이 모두 하나, '일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냥 생각해봐도, 내가 먹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고, 배설물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잖아요. 생태순환적인 사고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는 산안마을 사람들이 단지 생계 수단으로 닭을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양계는 야마기시가 사회 운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닭과 사람이 하나로 이어져서 닭에게도 행복한 양계를, 동시에 인간도 행복사회로 가는 길을 실현해보자는 것이었죠.”
 
서양의 근대사회는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어져있다고 유상용 회원은 말했다. 자연이건 작은 동식물이건 함부로 대하면 언젠가는 그 해가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소유라는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일 뿐입니다. 물건도, 식량도, 지구 자체도 함께 나누어 쓰는 것일 뿐이죠. 야마기시즘에서는 무엇에건 소유가 있고, 분리되어 있고, 내 것 아니면 못 쓴다는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이라고 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렇게 마음먹는 순간에 외로워지잖아요. 자본주의가 생산력이 발달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전제로 하고 있죠. 경쟁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그것이 ‘너를 이겨야 하는’ 투쟁적인 경쟁이라서 문제인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을 세상에 가르친 야마기시는 일본이 한창 전쟁을 치르고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던 1901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느 마을 축제에 갔다가 복숭아를 먹고 무심코 씨를 던졌는데, 그 씨가 지나가던 어른에게 맞은 사건이 그에게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 어른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어린 야마기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사람은 왜 화가 날까 하는 의문은 그의 평생을 지배했다. 열아홉 살 때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인적 없는 오두막에 들어가 홀로 지내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며, 진리를 펼쳐가는 데는 구체적인 방법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사랑, 석가모니의 자비……, 그동안 인류에게 주어진 가르침들은 모두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들뿐이다. 하지만 야마기시는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산안마을과 같은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 때문에 야마기시즘은 종교가 아니라 사회 운동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종교적으로 수련을 하는 대신, 야마기시는 연찬(硏鑽)이라는 방법을 택했어요. 연찬은 야마기시회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생각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사회를 구성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토론을 하기보다 생각을 모아가는 것인데요, 연찬에서는 듣기가 가장 우선시되죠. 나랑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물끄러미 또는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가 얘기를 하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예'하고 받아들여 보는 거죠. 그것을 ‘영위(영점에 위치한다)’라고 표현하는데요. 영어로는 제로 베이스(Zero base)가 되겠네요.”
 
내 생각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은 제로가 아니다. 내 생각이 있더라도 일단 내려놓고, 나랑 생각이 다른 상대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그 다음에 그 생각을 가져다놓고 정말은 무엇인가를 탐구해가는 과정이 연찬이다. 야마기시는 이것을 '자기를 풀어놓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몇 가지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야마기시즘 특별 강습 연찬회’이다. 7박 8일간, 일 년에 네 차례 정도 운영하는 이 프로그램에는 외부인이 참여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7박 8일을 꼬박 함께 생활하면서, 끊임없는 연찬을 통해 모든 것을 단정하고 고정하는 관념을 깨고 ‘정말의 것’(진짜)을 서로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눈앞에 있는 컵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컵과 정말 같은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요. 내 눈이 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눈에 비친 상이지 그것의 실체가 아니지요. 사람은 무엇을 보면 그것을 고정하려는 속성이 있어요. 내가 눈을 문지르면 사물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흔들리는 것뿐이잖아요. 자신의 생각이 곧 사실이라고 단정하는 데서 벗어나면, 내 생각도 틀릴 수 있고 상대의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대화를 할 때 내 생각이 옳다고 단정하고 출발하지 않게 되지요. 틀릴 수 있으니까 좀 더 개선하고 나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요.”
 
연찬회에서는 '화', 마음의 자유, 소유, 참된 행복 등의 테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후반부로 가면 ‘진실 사회’(야마기시가 명명한 것, 진리가 실제로 현현되는 사회)를 어떻게 전개해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한다. 이밖에 보름짜리 프로그램인 ‘연찬학교’도 있다. 회원들의 입소문을 타고 신청자가 많아 인기가 좋은 프로그램들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누가 배워가서 다른 데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산안농장에서만 하도록 했기 때문에 널리 확산되기엔 한계가 있었다.
유상용 회원의 고민이 시작된 것도 이 같은 문제와 맞물린다. 산안마을의 울타리 안에서만 실현되는 이상사회는 답답했다. 야마기시즘은 ‘무고정 전진’이라고 하는데, 어느 지점에서는 자꾸 고정되는 것이 보였다. 더구나 그즈음 새로운 청년 세대가 들어오지 않아 공동체가 노쇠하고 축소되어가는 것도 문제였다.
 
“산안농장과 연계되어서 다음 세대를 배출할 수 있는 청년 센터를 만들자고 건의를 했지요.
그런데 지금 실현지의 형태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의 반대에 부딪혔어요. 그래서 그 문제를 놓고 일 년 이상 논의(연찬)를 했는데, 결국 생각의 다름이 해소가 안 되더군요. 그분들은 새로운 시도보다는 산안마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저는 본질을 지키면서도 더 유연한 방식의 조직 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결국 '해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단독으로 나왔습니다. 앞으로 저의 활동을 통해 성과들이 나오면 다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연찬을 통해서도 생각이 접근되지 않은 부분은 안타깝지요.”
 
내가 가던 길이 애초의 생각과 다르거나, 다소 옳지 않은 점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현재의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 길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고,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상용 회원이 살아온 삶은 언제나 많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이었다.
 
“대학 때는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저도 학생 운동을 했지요. 몇몇 선배들과 함께 농대에 처음 탈춤반을 결성했는데 제가 1세대에요. 제적당하고, 군대에 갔다 오니까 89년이었는데 6월 항쟁을 겪은 후여서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 있더군요.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학생들을 복학시켜주었고, 저도 졸업을 했어요. 그때 함께 운동했던 선후배들은 운동의 다양성에 대해서 고민하던 시기였어요. 이전에는 정치 민주화가 최우선 과제였지만, 이제는 또 다른 대안이 될 사회 만들기가 과제가 된 것이죠. 다들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문화 운동 등으로 흩어지고, 취직을 해서 직장을 가지기도 하고…….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역할을 찾아 떠났어요.
저는 농업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같은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업 문제에서 진로를 찾으려는 생각에서 농대 내 동아리 우리농업연구회(농연)를 찾아가 ‘바른농업연구회’라는 소모임 활동도 했지요. 투쟁보다는 사이좋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고, 사이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곧 사회운동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간디가 했던 것처럼, 사회 문제에 대해 투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연스레 한살림, 카톨릭의 생명공동체 운동이나 도농 직거래 운동에 관심이 갔어요. 유기농, 자연농을 하는 공동체를 하면서 도시와 직거래를 통해 도시 사람들이 농장에 와서 견학도 할 수 있는 그런 모델을 구상했지요. 그즈음 나온 한살림 선언(1989.10.)의 영향도 컸어요.”
 
유상용 회원이 애초에 가졌던 구상은 한국의 전통 사상을 바탕으로 수행과 삶과 운동이 하나로 통일된 공동체였다. 당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원불교. 원불교는 신앙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실천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공부와 사회가 둘이 아니라는 원불교의 이념은 매력적이었다. 졸업 후에 원불교 내에서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 모임을 가졌다. 그중에는 원불교 교무도 있었다. 뜻을 같이 하는 3 세대 십여 명이 지리산 문수리에 들어갔다. 구례 토지면 버스 정류장에서 두 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산속이라서 기계를 쓸 수가 없어요. 소로 쟁기 갈아서 쌀농사를 지었죠.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몰라.(웃음) 죽염 사업도 하고, 나물 채취하고, 고로쇠 물도 받아다 팔고 그랬어요. 장차는 한봉을 해볼까 하는 계획도 있었죠. 그렇게 열심히 몇 달을 했는데, 막상 같이 살면서 각자 바라는 점들을 꺼내놓고 이야기해보니까 너무 다른 거예요. 처음에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내놓고 보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더군요. 사람의 생각을 모으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규모는 작고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데 꿈이 너무 종합적이니까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었고요.”
 
2월에 시작한 지리산 공동체는 그해 7월에 끝이 났다. 실패의 순간 느낀 절망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원불교 사상과 공동체의 실천 방향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동체를 시작하자 교단에서 교무들의 참가를 막아 나서기도 했다.
 
“절벽에 다다른 느낌? 그때 처음으로 길이 보이지 않더군요. 한 달 정도는 종교도 없는데 기도를 했어요.”
 
그렇다고 뜻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유상용 회원의 ‘길 찾기’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라즈니쉬의 제자들 모임에서 시인 류시화 씨도 만나고, 해외의 공동체로 눈을 돌려보기도 했다. 그러다 찾은 것이 '성스러운 빛의 전령사'라는 이름의 에미서리(emissaries) 공동체였다. 미국 콜로라도에 본부를 두고 있는 에미서리는 유상용 회원이 그때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이미 실현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를 결정적으로 매료시킨 것은 '진리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이 곳 하늘이다.'라는 한 문장이었다. 혈혈단신 혼자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떠났다.
 
“90년 8월에 갔다가 92년 2월에 돌아왔어요. 거기서의 삶도 좋았고, 앞으로 얼마든지 계속 교류할 생각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내가 가야 할 곳은 야마기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에미서리에 있는 동안 한국에 잠깐 나온 적이 있는데, 그때 조카를 데리고 어린이 캠프에 참석하러 산안마을에 갔다가 받은 깊은 인상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에미서리 공동체와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처음에 그에게 에미서리를 소개했던 한국인 캐나다 교포가 몇 년 전 제주도에서 에미서리 공동체를 시작해, 가끔 서로 연락이 오간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침내 찾은 산안마을에서 유상용 회원이 바라던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앞서 얘기한 대로다. 하지만 공동체도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에 맞춰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에서도 지난 2000년에 저랑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독립한 사람들이 있어요. 50명 정도가 나와서 혼슈 미에현의 스즈카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을 했지요. 조직에 집착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저와 같아요. 그분들도 나와서 처음에는 공동체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2008년에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KNI(켄산(‘연찬’의 일본식 발음) 네트워크 인터내셔널)'가 정식으로 출범했지요.”
 
스즈카는 새 길을 찾아 나선 유상용 회원의 중요한 교류 대상이다. 다음 달에도 벌써 방문 계획이 잡혀 있고, 강화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하던 세대의 자녀들이 곧 스즈카로 가서 교류 활동을 할 예정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사업은 스스로 길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위해 유상용 회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단은 역시 ‘연찬’이다. 그는 이것이 보수와 진보,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대립하고 다투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소통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했던 무소유 실험을 저는 좀 더 세상으로 넓히고 싶어요. 한 달에 한번 정도 지역 사람들이나 지인들, 관심 있는 분들과 연찬회를 열 생각이에요. 주제는 여러 가지를 다룰 수 있겠죠. 이곳 강화 지역에 농대 선배도 있고, 제가 동아리 탈반 활동할 때 만났던 친구도 있고, 기존에 시민운동을 했던 분들도 있어요. 요청이 있으면 다른 단체에 가서 연찬 진행을 할 수도 있겠죠. 연찬의 사고방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하고요.”
 
그의 구상은 이미 하나씩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강화에서 ‘마리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사단법인 ‘밝은마을’ 관계자들과의 연찬회가 있었다. 스즈카 사람들도 와서 함께 한 자리였다. 이번 1월에는 ‘한살림’ 전주?익산 시민운동가들과 강화지역 활동가들이 모여 ‘시민운동 간의 소통 및 소통 가능한 사회 만들기’를 주제로 4박5일간 연찬회를 열었다.
 
이번 연찬회는 “무엇이든 주제가 있으면 다 같이 제로 베이스에서 함께 생각해보는 연찬적 사고방식을 연습해본 것”이라고 유상용 회원은 말했다. 우리 사회는 진보든 보수든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얕다. 상대를 적으로만 생각하고, 쉽게 선을 그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사실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에 적으로 보일 뿐이다. 상대는 이렇다고 단정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좀 더 상대의 말을 들어보고 탐구해보고, 질적으로 서로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들이 연찬회에서 나왔다. 연찬은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거리도 가능할 수 있도록 좁혀준다. 연찬회에서는 이밖에도 다양한 얘기가 나왔다. 보수의 기득권 문제만이 아니라 진보의 기득권 문제는 없는가? 또 내 안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경향은 없는가? 많은 것을 돌아본 시간이었다.
 
“이번 연찬회에는 충북에 계시는 한살림 조희부 선생님하고 전에 산안마을에 같이 살았던 전북 장수의 이남곡 선생님도 참석하셨어요. 이남곡 선생님은 남민전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셨던 분이죠. 그 연세에 그 정도 유연성을 가진 분들은 한국 사회에 거의 없을 것 같아요. 이 선생님은 이전부터 진보? 보수를 넘어 다 같이 함께 연찬해가자는 뜻이 있으셨어요. 연찬을 야마기시즘의 독점물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할 수 있도록 보편화하자는 것이죠.”
 
유상용 회원은 삼 년 전만 해도 강화도에 아무 연고가 없었다. 야마기시즘을 세상으로 넓히기 위해 적당한 곳에 청년 센터 같은 것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부터, 그는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공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삼 년 전에 강화를 주목하게 됐다고 한다. 강화도는 삼국시대만 해도 두 개의 작은 섬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후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바다를 메워 간척을 해서 지금의 섬이 된 것이다. 생각해볼수록 강화는 특별한 곳이었다. 외침이 있으면 왕실은 이곳으로 피난을 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에 맞서 항전하면서 39년간이나 수도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바다로 나가는 관문인 동시에 외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략적 요지. 단군이 마니산에서 천제를 올린 것은 그만큼 이곳이 평범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니산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도 매해 천제가 올려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화만한 곳이 없더군요. 인천공항도 멀지 않고요. 그때는 아시아 지역 청년들이 와서 교류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국제적인 청년 센터를 구상했었으니까요. 산안마을 다른 분들과 제 생각이 달라서 결국 무산됐지만.”
 
그는 지난해 6월부터 강화도의 한 펜션을 구입해 운영하고 있다. 18년간 ‘무소유’의 삶을 살다가 이제 ‘소유’의 세상에 나와 펜션 사장님이 된 것이다. 산안마을에서 지원해준 돈으로는 부족해 빚도 내고 어렵사리 시작하게 됐다. 일반인들에게 대여도 하지만, 사안이 있을 때마다 필요한 활동의 베이스캠프로 쓸 생각이다. 작년 12월에는 해외 각지에 자원봉사자를 파견하는 '국제 워크캠프 기구'의 자원봉사자 캠프가 1박2일 동안 이곳에서 열렸다.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100일간 열린 평화 순례 ‘워크 나인’도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해서 출발했다. 일본의 평화운동가 마사키 다카시씨가 주도하고 한국의 도법스님 등이 참가해 100일 동안 한국 땅 구석구석을 누빈 ‘워크 나인’은 많은 언론과 시민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워크 나인이라는 이름은 ‘걷다’라는 뜻의 ‘walk’와 일본 평화헌법 9조의 ‘9’를 합성해 만든 것이다.
 
“참가자들이 저희 집에서 길게는 4박5일간 준비모임을 가졌어요. 첫날 마니산 등반이 첫 일정이었지요. 부천, 서울, 동해안, 부산을 거쳐서 남해안을 돌아 올라와서 임진각에서 마쳤어요. 도중에 한국의 아픔이 있는 곳곳을 들렀어요. 나눔의 집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한다거나, 광주 민주화 묘소를 참배하는 활동을 했지요. 한?일간 고대사에 대해 공부도 하고. 지금의 현대 문명은 서양이 일으켰지만 편리함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죠. 그 해결책은 서양 문명이 아니라 동양의 사상적 전통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 마사키씨의 생각이에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우선 일본, 한국, 중국이 동아시아 문명을 회복하고, 그것을 통해서 세계에 메시지를 보내자는 것이죠. 모든 것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서양 문명에 반해, 사물을 일체라고 보고,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눈이 동아시아 전통에 있어요. 서양만 바라보지 말고 여기서부터 다툼 없는 평화, 아시아발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던지자는 운동이에요.”
 
스즈카 지역과도 더 활발한 교류를 할 생각이다. 머지않아 강화도 출신의 대학생 4명이 보름 일정으로 스즈카로 떠난다. 강화도에서 '콩 세알'이라는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동문, 목사님 등 강화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했던 세대의 자녀들이다. 대안학교를 나왔는데도 대안사회가 없어 기존 사회로 편입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던 청년들이 스스로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서 보겠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부모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우연히 나왔다. 유상용 회원 자신도 다음 달부터 스즈카에서 하는 새로운 방식의 연찬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간다. 그가 꿈꾸는 것은 어렵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삶,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즐겁게 길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랑방 역할을 하고 싶어요. 관심 있는 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주시면 좋겠어요. 함께 대화도 하고, 기회도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야마기시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계속 의문을 던지고 죽을 때까지 끝없는 실험을 거듭했다고 한다.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일부러 아내를 화나게 만드는 등 실험을 계속했는데, 나중에는 부인이 화가 치밀어 그의 머리에 뜨거운 물을 끼얹은 적이 있었을 정도라고. 살아생전에 '나를 위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농장 한쪽에 비석도 없는 작은 무덤으로만 남았다는 야마기시.
가슴 속 질문에 답하기 위해 끝없이 새로운 도전을 피하지 않는 유상용 회원의 모습이 어쩐지 그를 닮았다.
 
 
펜션 우리꽃자리 :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 666-6
www.cochari.com
Tel. 032-937-3912
대중교통 : 지하철 신촌역 7번 출구로 나가 직진 200m 지점에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다. 10-15분 간격 운행. 강화 터미널에서 펜션 근처까지 시내버스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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