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시대
유신의 광기에 묻힌 ‘겨울공화국’
대통령을 99.9%의 찬성으로 체육관에서 뽑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나라,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그대로 법이 되고 헌법도 정지되는 나라. 유신 시절, 우리는 이런 나라에서 살았다.
1975년 봄 유신체제에 대한 온 국민의 저항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을 때 박정희를 구한 것은 4월30일 월남의 패망이었다. 월남 군사독재정권이 자신의 무능과 부패로 몰락한 것을 박정희는 공산주의 침략 탓으로 돌리며 관제 안보궐기대회 등으로 한반도에서 당장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혼란을 야기하여 북한의 침략을 방조하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였다. 안보 분위기에 휩쓸려 유신에 대한 저항이 주춤해진 5월13일 박정희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긴급조치 9호였다.
긴급조치 9호는 그 내용이 1호나 4호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형량을 보다 현실화한 것뿐이었다. 즉 일체의 반유신활동과 그에 대한 보도나 전파를 금지하되 형량은 1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하며 재판도 일반 법정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1호나 4호가 반유신활동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형량도 사형, 무기 운운한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현실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반유신활동에 대한 처벌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은 이 조치가 그야말로 긴급한 것이 아닌 일상적인 것, 즉 일상 법률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직후인 5월22일 서울대생들이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하여 긴급조치 9호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도 했으나, 학생운동은 곧 기나긴 침묵으로 들어갔다. 안보 분위기와 긴급조치의 칼날이 위세를 떨친 것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청학련 사건과 75년 봄의 투쟁으로 학생운동의 역량이 이미 거의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학생회는 해체되었다. 대신 북한의 침략 위협을 핑계로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간부들을 대학 총장이 임명했다. 교정은 중앙정보부와 경찰에서 나온 정보원들로 가득했고, 조금만 학내 분위기가 이상하면 전투경찰이 완전무장한 채로 교내에 상주했다. 교수들은 자기가 할당받은 학생들이 혹시 데모에 관련되어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책은 모두 판매금지되었고, 외국 잡지는 한국관련 기사가 모두 가위질당하거나 시꺼멓게 먹칠된 채 판매되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허무주의가 팽배해졌다. 75년에서 76년 사이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송창식의 노래였다. 모두 술 마시고 노래하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저 넓은 동해바다에서 자유롭게 숨쉬는 고래를 그리며 살았다. 이마저 대학생들이 많이 부르는 불온한 노래라 하여 방송금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암흑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감출 수는 없었다. 화장실 벽에다, 혹은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뒷골목에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를 쓰고는 그 비겁한 자신이 몸서리치게 미워서 울고, 민주주의를 외치다 저들에게 끌려간 벗들의 피묻은 얼굴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런 속에서 학생운동의 대열은 다시 정비되기 시작했다.
76년 12월8일, 졸업을 2개월 앞두고 서울대 법대 4학년 이범영·박석운·백계문은 당시 미국 정계를 뒤흔들고 있던 박동선 사건의 해명과 유신 철폐, 긴급조치 해제, 구속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첫눈이 오는 쌀쌀한 날씨 속에 진행된 이날 데모는 학내에 상주한 형사들과 교직원들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지만, 긴급조치 9호 시대 학생 데모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전 데모가 주로 대학 2~3학년생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과 달리 4학년생들이 주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4학년이 되면 학내 시위에서 손을 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데모는 곧 제명과 징역’이라는 긴급조치 9호 시대의 엄혹한 환경에서 데모는 자신의 전 인생을 건 신중한 결단일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사회과학 공부를 통하여 이 길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동안 겪어야 할 온갖 고난을 각오하지 않는 한 데모는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하여 주동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길은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박정희 군사독재가 물러가고 진정한 민주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계속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이었다. 학내 시위를 주동한다는 것은 장차 직업적인 민주화 운동가로 살아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고, 그만큼의 연륜과 성숙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77년 봄 서울대와 한신대에서 소규모 데모가 일어나면서 학생운동은 마침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77년 10월7일 서울대 26동 대형강의실에서는 ‘1920년대 한국 민족운동의 고찰’이라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학내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당일 일방적으로 심포지엄을 취소했다. 강의실에 모여있던 학생들이 학교 당국의 처사에 항의하자 학교 당국은 강의실까지 봉쇄했다. 이에 강의실 안의 학생들은 “어용교수 물러가라” “학원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고, 강의실 밖에서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학원자유 보장” 등을 외치며 저녁 늦게까지 전투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의 시위는 학교 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사전에 계획적으로 조직된 시위로 몰아가면서 8명이나 구속 기소했다.
한편 이날 시위로 인해 서울대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후 최초로 20일간의 휴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이후 타오를 유신반대 데모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10월26일에는 연세대생 4,000여명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학내 시위를 벌이다가 75년 5월 이후로는 최초로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신촌로터리까지 진출했다. 11월11일에는 서울대에서, 12일과 14일, 18일에는 서강대에서 연속 학내 시위가 전개되었다.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학생운동이 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78년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시위는 일상화하기 시작했다. 서울대·고려대·이화여대·숙명여대·전남대·경북대·인하대 등 전국에 걸쳐 학생들의 유신반대 데모가 거의 매달 일어났다. 78년 학생운동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학생들이 학내에만 머물지 않고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78년 6월12일 서울대에서 일어난 학내 시위에서 학생들은 6월26일 광화문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벌이자고 제창했다. 사전 계획의 미비와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 때문에 산발적인 시위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날 시위를 계기로 학생들은 가두 진출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4학년 성욱은 6월12일의 서울대 데모에서 1동 3층 난간 위에 올라가 시위를 주동했다. 그가 그 위험한 건물 3층 난간 위에 올라간 것은 단지 ‘5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학내에 형사와 전투경찰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동자가 5분을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데모 성공의 사활적 요소였다. 학생들이 모일 때까지 주동자가 5분만 형사들에게 잡혀가지 않고 버틸 수 있으면 데모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 5분을 벌기 위하여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3층 난간 위에 섰다. 이후 이 ‘5분 전술’은 학내 시위의 전술 교범이 되었다. 그러나 이 5분 때문에 훗날 전두환 시절 많은 꽃다운 생명이 도서관 난간에서,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이 나라 민주주의의 제단에 고귀한 피를 바쳐야만 했다.
인하대생 박성룡은 10월17일 인하대 교내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구속되었다. 그는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의 부친이 교도소 작업과장이었다. 아들은 징역을 살고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박성룡의 아버지는 매일 자식의 먹을 것을 싸들고 교도소로 출근했다고 한다. 규정 위반이지만 그것이 부자지간의 정이었다.
79년 들어 학생들의 유신반대 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유신독재는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거나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결코 학생들의 저항을 꺾을 수 없었다. 박정희와 학생운동은 마주 향해 달리는 기차처럼 궁극적 충돌을 향하여 계속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79년 10월의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그 정점이었다.
“학우여” 외치기도전 경찰 즉시 들이닥쳐
1975년 5월13일 오후 3시에 발동돼 박정희가 사망한 후인 79년 12월7일 밤 12시에 해제되기까지 1,669일 9시간 동안 지속된 긴급조치 9호. 앞서 공표된 긴급조치들을 포괄한 ‘반민주주의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긴급조치 9호는 모든 국민을 병영 속에 몰아넣었다.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관한 일체의 비방이나 개폐 논쟁을 금지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헌법’이라는 말을 입밖에만 내어도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긴급’이라는 표현과 달리 긴급조치는 장시간 지속된 탓에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구류된 사람은 580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박정희 정권 말기로 갈수록 대학별, 또는 대학간 연합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캠퍼스 곳곳에 감시의 눈초리가 번득이는 상황에서는 성명서 한장 제대로 낭독하기 어려웠다. 특히 서울대는 75년 캠퍼스를 동숭동에서 관악산 밑으로 옮김에 따라 관악 캠퍼스 정문 앞에 기동경찰 300여명이 항시 대기할 수 있는 지상 2층, 지하 1층의 건물이 들어서 ‘동양 최대의 파출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처럼 경직된 상황은 ‘하 사건’이라는 웃지 못할 소극(笑劇)까지 만들어냈다. 학내 시위는 학생식당이나 도서관 등 학생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한두 학생이 주동하고 나서는 것이 보통인데 “학우여”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학우여”를 다 외치지도 못하고, “하~” 하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주동 학생을 끌고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긴장 속에 준비한 시위가 허무하게 무산된 후 술집에 몰려간 학생들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울분을 토하다 그것 때문에 끌려간 일도 있어 ‘막걸리 긴급조치’란 말도 생겨났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 기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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