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국화꽃 피우기 위해’
농촌공사에 농지매입 신청서를 접수하면서
김규태 기자 mr@gimpo.com
"못내못내 절대못내 부당수세 절대못내!", "애태우고 속태우는 노태우고추 불태우자!", "천만농민 단결하여 농민세상 앞당기자!"… 지난 1989년 2월13일, 여의도에서 치러진 이른바 '2.13여의도농민대회'.
농민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며 교사발령을 포기하고 선택한 농업. 농촌생활 1년만에 경험했던 2.13여의도농민대회의 기억은20여년을 지났건만 아직도 선하다.
농협 직원들까지도 '관사람'처럼 인식하며 숨죽여 살아오던 농민들이 서울 여의도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광장에 모여든 2만여명의 농민들은 ‘우리가 바라는 농민세상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학생운동의 경험은 ‘깨어있는 자만이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알려줬고, 이후 농촌에 정착하자마자 소모임 부터 만들어 농민들의 권리가 무엇인지 공부를 시작했었다. 1년간의 소모임 활동을 마치고 드디어 1988년 12월22일 '김포자주농우회'가 창립됐다. 농촌생활 1년만에 '김포자주농우회' 이름으로 참가했던 '2.13여의도농민대회'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이후 1990년 전농이 탄생하면서 김포자주농우회는 김포시농민회로 확대 발전된다)
"천만농민 단결하여 농민세상 앞당기자!" 당시의 모든 구호엔 '천만' 이란 숫자가 들어 있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350만도 채 안되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650만명이 등지고 떠나간 농촌. 남아 있는 350만 농민들은 오늘도 ‘한ㆍ미FTA’라는 괴물과 마주하고 정치꾼들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큰 한숨 토해내고 있다.
農者天下之大本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 농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준 말 농자천하지대본. 온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 지고 있다는 자부심에 좋은 옷은 커녕 아이들 교육 제대로 못 시켜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꿋꿋하게 버텨 왔더랬다.
수입개방의 여파로 농민들이 지을 농사가 없어 돈 되는 작물을 찾아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릴때 나 또한 고추농사, 포도농사, 채소농사를 전전하다 결국 국화농사를 선택한 이후 지금까지 15년째 하우스농사를 이어 오고 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 싯구절을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든 감성을 다 동원 하여 실컷 울어보고도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한시라도 긴장을 풀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위기감에 내 목은 늘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우스 15년, 국화농사 11년
처음엔 하우스만 지어 놓으면 농촌에 있는 돈을 다 긁어 모을 줄 알았다. 그 다음엔 하우스 규모를 늘려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엔 경영을 현대화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견학을 다니고 교육을 받고 하면서 점점 그 규모를 넓혀왔다.
1992년엔 농어민후계자로 선정되었고 1996년엔 '전업농'도 되었다. 경영 규모도 600평 에서 1300평으로, 그리고 2000평으로, 그것도 모자라 년 3기작을 하여 연면적 6000평에 가깝게 농사 규모를 늘려 왔다.
우리 부부의 노동력도 점점 늘어나 7년전부터는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게 되었고 점점 오르는 기름값을 아끼려고 하루 350장씩 연탄을 6년째 때오고 있다. 이러한 연탄값도 점점 올라 내년에는 지금의 세배나 오를것 이라고 한다.
헝크러진 관계들
하우스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농민운동 활동량이 줄어들었고 하우스 규모가 늘어나면서부터는 거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다시피 하였다.
마음도 같이 변해갔다. 농민운동한다고 농촌으로 내려왔는데 농삿일에만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던지… 하루 빨리 농사 기반을 잡아 놓고 활동력을 복원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그날을 생각하며 일하고 또 일만 했다. 그러나 그날은 커녕 점점 더 수렁속으로 해매여야 했다.
농민운동 동지들은 내 몫까지 책임을 지느라 허리가 휘고, 난 나대로 밑빠진 독을 채워 넣느라 온 집안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형제들은 물론이고 처갓집까지 잡혀 먹었다. 그래도 IMF도 버텨 냈는데, 빚은 점점 늘어만 갔다. 2년전 암수술을 받은 큰 아들놈 병원에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일만 했다.
변한것과 변하지 않은것
맨 처음 농민운동한다며 종횡무진 돌아다니던 2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게 있다. 2~30대 청년들이 4~50대로 변하고 수많은 선배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경운기가 트랙터로 변하고, 콤바인 포대가 없어지고, 오토바이가 트럭으로 변하고, 군부독재가 사라지고, 집집마다 컴퓨터가 생기고, 휴대폰 없는 사람이 없다.
세상이 그런데 아직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우리 농민들의 구호가 아닐런지. 목이 터져라 농민세상을 외쳐댔건만 농민세상은 오지 않고 텅 빈 들녘에 농민들이 남기고 간 구호만 메아리치고 있다.
박수를 치던 시민들도 이젠 너나없이 자기 코가 석자다 보니 관심이 예전 같지 않고, 한 표가 아쉬운 정치꾼 들도 별로 아쉬워 하지 않는 그런 황무지에 가슴이 시커멓게 탄 농민들만이 아무도 구경하는 이 없건만 목젖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어떻게 사는게 잘 사는 것일까
얼마전 큰 아들놈이 두번째 암 수술을 받았다. 아침 저녁으로 하우스 문을 여닫아야 하고, 점심때는 연탄온풍기 연탄도 갈아야 한다.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만 수술 전날 나는 원자력병원에서 아들놈과 단 둘이서 하룻저녁을 보냈다.
집사람은 나 대신 하우스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 있어야 했고 두번째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무언가 긴박한 판단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에서 밤을 보낸 것이었다.
오랫만에 옛날 생각을 해보았다. 꿈 많던 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 학림사건으로 군대에 강제징집 되었던 일, 하루라도 빨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학교를 작파하고 위장취업에 나섰던 일, 대공분실에 끌려가 죽도록 매맞던 일,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발령을 기다렸지만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발령이 안 나던 일, 김포 정착 후 도중에 발령이 났던 일, 후계자 자금으로 무기둥 하우스를 짓고 세상을 다 얻은듯 좋아 하던 일, 하루 빨리 활동력을 복원하고자 아둥바둥 살아온 세월이었다.
내가 대학 진학하게 되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큰동생, 시동생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닭장사를 해야만 했던 나 보다 두살 위인 형수, 내가 교사 발령을 포기했을때 말 없이 눈물만 짓고 있던 형수를 보며 하루 빨리 멋진 세상을 만들어 보답하겠노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또 쥐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은 커녕 빚에 짖눌려 제 몸 하나 간수도 못했다. 한심했다.
땅 문서를 내어 놓으며
몇 일 전에 한국농촌공사 김포지사에 '농지매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농촌공사에서 요구한 서류도 모두 제출 했다. 등기부등본, 토지대장, 지적도등본, 주민등록등본, 재산세과세증명, 토지이용계획확인원, 부채증명서, 경영일지, 농지원부…
농지의 소유권은 내 손에서 떠났지만 다행이 농사는 계속 지을 수 있다. 앞으로 5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5년 후에는 다시 농지를 살 수가 있다고 했다. 이것이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농가부채대책으로 작년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실시되고 있다.
작년에는 급한 농민들부터 구제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연체 5천만원 이상인 농가에만 신청 자격을 주었지만 올해부터는 부채 규모가 5천만원 이상인 농가는 누구나 신청이 가능해졌다. 김포에서도 작년에 한명, 올 해 에는 나를 포함해 2명이 신청했다.
집행유예 5년

문화생활, 취미생활은 고사하고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현실. 인건비, 자재대, 기름값, 농협이자등을 내고 나면 생활비도 모자라 또다시 빚을 져야만 했다.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하건만 일 한 만큼 빚의 양 또한 늘어만 갔다.
이러한 현실이 앞으로 5년 동안 개선이 될 수 있을까. 정말 5년 후에는 정부의 계획대로 농민들
이 다시 농지를 환매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듯 정부의 정책에 또다시 속는 것은 아닐까.
2007년 03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