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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i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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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시대
유신의 광기에 묻힌 ‘겨울공화국’
대통령을 99.9%의 찬성으로 체육관에서 뽑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나라,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그대로 법이 되고 헌법도 정지되는 나라. 유신 시절, 우리는 이런 나라에서 살았다.
1975년 봄 유신체제에 대한 온 국민의 저항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을 때 박정희를 구한 것은 4월30일 월남의 패망이었다. 월남 군사독재정권이 자신의 무능과 부패로 몰락한 것을 박정희는 공산주의 침략 탓으로 돌리며 관제 안보궐기대회 등으로 한반도에서 당장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혼란을 야기하여 북한의 침략을 방조하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였다. 안보 분위기에 휩쓸려 유신에 대한 저항이 주춤해진 5월13일 박정희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긴급조치 9호였다.
긴급조치 9호는 그 내용이 1호나 4호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형량을 보다 현실화한 것뿐이었다. 즉 일체의 반유신활동과 그에 대한 보도나 전파를 금지하되 형량은 1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하며 재판도 일반 법정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1호나 4호가 반유신활동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형량도 사형, 무기 운운한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현실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반유신활동에 대한 처벌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은 이 조치가 그야말로 긴급한 것이 아닌 일상적인 것, 즉 일상 법률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직후인 5월22일 서울대생들이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하여 긴급조치 9호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도 했으나, 학생운동은 곧 기나긴 침묵으로 들어갔다. 안보 분위기와 긴급조치의 칼날이 위세를 떨친 것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청학련 사건과 75년 봄의 투쟁으로 학생운동의 역량이 이미 거의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학생회는 해체되었다. 대신 북한의 침략 위협을 핑계로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간부들을 대학 총장이 임명했다. 교정은 중앙정보부와 경찰에서 나온 정보원들로 가득했고, 조금만 학내 분위기가 이상하면 전투경찰이 완전무장한 채로 교내에 상주했다. 교수들은 자기가 할당받은 학생들이 혹시 데모에 관련되어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책은 모두 판매금지되었고, 외국 잡지는 한국관련 기사가 모두 가위질당하거나 시꺼멓게 먹칠된 채 판매되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허무주의가 팽배해졌다. 75년에서 76년 사이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송창식의 노래였다. 모두 술 마시고 노래하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저 넓은 동해바다에서 자유롭게 숨쉬는 고래를 그리며 살았다. 이마저 대학생들이 많이 부르는 불온한 노래라 하여 방송금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암흑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감출 수는 없었다. 화장실 벽에다, 혹은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뒷골목에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를 쓰고는 그 비겁한 자신이 몸서리치게 미워서 울고, 민주주의를 외치다 저들에게 끌려간 벗들의 피묻은 얼굴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런 속에서 학생운동의 대열은 다시 정비되기 시작했다.
76년 12월8일, 졸업을 2개월 앞두고 서울대 법대 4학년 이범영·박석운·백계문은 당시 미국 정계를 뒤흔들고 있던 박동선 사건의 해명과 유신 철폐, 긴급조치 해제, 구속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첫눈이 오는 쌀쌀한 날씨 속에 진행된 이날 데모는 학내에 상주한 형사들과 교직원들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지만, 긴급조치 9호 시대 학생 데모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전 데모가 주로 대학 2~3학년생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과 달리 4학년생들이 주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4학년이 되면 학내 시위에서 손을 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데모는 곧 제명과 징역’이라는 긴급조치 9호 시대의 엄혹한 환경에서 데모는 자신의 전 인생을 건 신중한 결단일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사회과학 공부를 통하여 이 길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동안 겪어야 할 온갖 고난을 각오하지 않는 한 데모는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하여 주동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길은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박정희 군사독재가 물러가고 진정한 민주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계속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이었다. 학내 시위를 주동한다는 것은 장차 직업적인 민주화 운동가로 살아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고, 그만큼의 연륜과 성숙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77년 봄 서울대와 한신대에서 소규모 데모가 일어나면서 학생운동은 마침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77년 10월7일 서울대 26동 대형강의실에서는 ‘1920년대 한국 민족운동의 고찰’이라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학내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당일 일방적으로 심포지엄을 취소했다. 강의실에 모여있던 학생들이 학교 당국의 처사에 항의하자 학교 당국은 강의실까지 봉쇄했다. 이에 강의실 안의 학생들은 “어용교수 물러가라” “학원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고, 강의실 밖에서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학원자유 보장” 등을 외치며 저녁 늦게까지 전투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의 시위는 학교 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사전에 계획적으로 조직된 시위로 몰아가면서 8명이나 구속 기소했다.
한편 이날 시위로 인해 서울대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후 최초로 20일간의 휴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이후 타오를 유신반대 데모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10월26일에는 연세대생 4,000여명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학내 시위를 벌이다가 75년 5월 이후로는 최초로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신촌로터리까지 진출했다. 11월11일에는 서울대에서, 12일과 14일, 18일에는 서강대에서 연속 학내 시위가 전개되었다.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학생운동이 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78년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시위는 일상화하기 시작했다. 서울대·고려대·이화여대·숙명여대·전남대·경북대·인하대 등 전국에 걸쳐 학생들의 유신반대 데모가 거의 매달 일어났다. 78년 학생운동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학생들이 학내에만 머물지 않고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78년 6월12일 서울대에서 일어난 학내 시위에서 학생들은 6월26일 광화문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벌이자고 제창했다. 사전 계획의 미비와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 때문에 산발적인 시위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날 시위를 계기로 학생들은 가두 진출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4학년 성욱은 6월12일의 서울대 데모에서 1동 3층 난간 위에 올라가 시위를 주동했다. 그가 그 위험한 건물 3층 난간 위에 올라간 것은 단지 ‘5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학내에 형사와 전투경찰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동자가 5분을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데모 성공의 사활적 요소였다. 학생들이 모일 때까지 주동자가 5분만 형사들에게 잡혀가지 않고 버틸 수 있으면 데모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 5분을 벌기 위하여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3층 난간 위에 섰다. 이후 이 ‘5분 전술’은 학내 시위의 전술 교범이 되었다. 그러나 이 5분 때문에 훗날 전두환 시절 많은 꽃다운 생명이 도서관 난간에서,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이 나라 민주주의의 제단에 고귀한 피를 바쳐야만 했다.
인하대생 박성룡은 10월17일 인하대 교내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구속되었다. 그는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의 부친이 교도소 작업과장이었다. 아들은 징역을 살고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박성룡의 아버지는 매일 자식의 먹을 것을 싸들고 교도소로 출근했다고 한다. 규정 위반이지만 그것이 부자지간의 정이었다.
79년 들어 학생들의 유신반대 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유신독재는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거나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결코 학생들의 저항을 꺾을 수 없었다. 박정희와 학생운동은 마주 향해 달리는 기차처럼 궁극적 충돌을 향하여 계속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79년 10월의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그 정점이었다.
“학우여” 외치기도전 경찰 즉시 들이닥쳐
1975년 5월13일 오후 3시에 발동돼 박정희가 사망한 후인 79년 12월7일 밤 12시에 해제되기까지 1,669일 9시간 동안 지속된 긴급조치 9호. 앞서 공표된 긴급조치들을 포괄한 ‘반민주주의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긴급조치 9호는 모든 국민을 병영 속에 몰아넣었다.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관한 일체의 비방이나 개폐 논쟁을 금지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헌법’이라는 말을 입밖에만 내어도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긴급’이라는 표현과 달리 긴급조치는 장시간 지속된 탓에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구류된 사람은 580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박정희 정권 말기로 갈수록 대학별, 또는 대학간 연합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캠퍼스 곳곳에 감시의 눈초리가 번득이는 상황에서는 성명서 한장 제대로 낭독하기 어려웠다. 특히 서울대는 75년 캠퍼스를 동숭동에서 관악산 밑으로 옮김에 따라 관악 캠퍼스 정문 앞에 기동경찰 300여명이 항시 대기할 수 있는 지상 2층, 지하 1층의 건물이 들어서 ‘동양 최대의 파출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처럼 경직된 상황은 ‘하 사건’이라는 웃지 못할 소극(笑劇)까지 만들어냈다. 학내 시위는 학생식당이나 도서관 등 학생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한두 학생이 주동하고 나서는 것이 보통인데 “학우여”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학우여”를 다 외치지도 못하고, “하~” 하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주동 학생을 끌고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긴장 속에 준비한 시위가 허무하게 무산된 후 술집에 몰려간 학생들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울분을 토하다 그것 때문에 끌려간 일도 있어 ‘막걸리 긴급조치’란 말도 생겨났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 기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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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왜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나

- 박정희와 박정희기념사업에 대한 연구소의 공식 입장 -


민족문제연구소

*** 두 가지가 잘못된 박정희 기념사업


김대중정부는 700억 원이 소요되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에 200억원을 국고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가을 정기국회에 특별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나머지 500억원은 민간 모금으로 메운다고 한다. 이 뿐 아니다. 정부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부근 공원의 5,000평을 기념관 터로 무상제공하기로 했다. 박정희 기념관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내력이야 어떠하든, 2002년 월드컵 관광객에겐 축구경기 외에 또 하나 눈요기감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처럼 박정희 기념관은 역사명소이자 관광지로 자리잡게 될 것인가? 박정희 기념관은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물론 박정희를 찬양하거나 미화하려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하며, 이들은 박정희를 '기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 정부 또한 화해와 용서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지역 감정의 해소를 위해 그리고 대통령이 공약한 사안이라는 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 기념관 건립사업에 정부가 나선 까닭을 변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각자 처한 위치가 다를지라도 다양한 동기와 이해 관계 속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일치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기념관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결코 추진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박정희는 우리가 기념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정희는 21세기로 나아가면서 우리가 청산해야 할 20세기의 낡은 유산이다. 박정희의 일생과 삶의 방식 그리고 그가 현대사에 끼친 악영향을 보자면 박정희는 역사의 '반면교사'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박정희가 우리 역사에 끼친 부정적 영향을 우리가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과 다름없다. 국민 대다수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국고를 지원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어떤 형식이든 박정희 기념관 자체가 거부되어야 한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이 부당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사업을 추진하는 동기가 대단히 불순할 뿐 아니라 역사를 또한번 왜곡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라는 민간 기구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인데, 굳이 정부가 이 사업에 앞장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국민의 정부, 인권대통령이라 자처하는 김대중대통령이 스스로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을 맡아 이 일에 앞장설만큼 어떤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일 현 정권이 박정희를 기념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반대급부를 노리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기만하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사태는 비관으로 흐르고 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에 정부가 나서고 야당이 지지하는 현재의 분위기를 볼 때 박정희 기념관은 예정대로 건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대다수 국민이 한결같이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만이 이 불행한 사업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 검토함으로써 박정희가 왜 기념 아닌 청산의 대상인지 명확하게 해명하고, 현재 진행되는 기념관 건립사업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널리 밝힐 필요가 있다

*** 박정희를 옹호하는 논리들


박정희를 옹호하는 근거 가운데 크게 논란이 되거나 주요한 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박정희는 친일파라고 하지만 그 친일 행위는 미미하다. 그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것은 해방 직전 1,2년에 불과하며 실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참가한 적도 없다.(어떤 이들은 이 시기 박정희는 광복군과 연결되어 독립운동을 모색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방 후 한 때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담했지만, 특무대에 체포된 후 박정희가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고백함으로써 군부 내 좌익세력을 발본색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박정희의 일생에서 친일 또는 좌익전력은 극히 일부분의 시기에 국한되며, 이후 그가 끼친 역사적 공로를 볼 때 사실 무시해도 무방하다.


2. 4 19 이후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민주당은 무능했다. 더욱이 혁신계 세력이 급진적인 통일운동을 전개해 적화통일의 위험마저 있었다.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회는 더욱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박정희의 쿠테타는 그 형식이야 어떠하든 '사회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3. 박정희 유신체제는 후진국(또는 제3세계) 근대화(혁명)의 한 유형으로 파악해야 한다. 후발국가에서 근대화를 빠르게 이룩하기 위해 지도자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비록 인권문제는 소홀했지만 박정희는 '빵문제'를 해결하고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은 일종의 고도성장의 착수금을 확보하는 과정이었이며, 박정희의 이러한 정책 결단은 현실적이며 올바른 것이었다. 박정희 집권기는 '위대한 조국근대화의 시기'로 재조명해야 한다.


4. 역대 정권 가운데 박정희 정권만큼 민족주의적인 정권은 없었다. 박정희는 민족주체성과 민족정기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주한 미군 철수나 독자 핵개발를 추진했다. 아마 박정희는 독자 핵개발이 성공했으면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의 죽음을 당해 종신독재자의 오명을 써야 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상당 부분 기초적인 역사 사실을 왜곡하거나 그 근거가 대부분 박약하다. 이들이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는 '조국근대화 신화' 또한 박정희 시기 우리 경제를 과대평가하거나 잘못된 가치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들은 박정희 집권기에 시행된 여러 정책을 그 전후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떼어내어 자의적으로 미화하고 있다. 마치 병들어 죽어가는 환자의 몸을 분리시켜 이 가운데 손가락, 발가락은 싱싱하니 결국 전체 몸도 싱싱하다는 식으로 견강부회, 침소봉대하고 있다. 심하게는 이들은 민주사회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가치관까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논리로 동원하기도 한다. 이제 이들의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 왜 우리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정희의 친일 전력은 그 동기나 행위 면에서 동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그의 말을 빌리자면 "큰 칼을 차고 싶어"--스스로 일본제국 장교의 길을 택했다. 가난, 무지, 만용, 징병 등의 이유로 일본군에 들어간 것과 다른 자발적 친일의 전형이라 하겠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1944년 만주군 제5관구 예하 보병 8단에 배속받은 박정희는 그곳에서 조선인`중국인 항일빨치산을 적으로 삼고 싸웠다. 그가 실제 전투에 참여해 몇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살상했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항일독립운동세력을 적으로 삼는 제국군인의 임무를 충실히 다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정희가 이 시기 광복군의 비밀조직과 연결되었다는 소문 또한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 그의 충성세력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박정희는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박정희는 일제 패망 때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체화시킨 최후의 제국군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박정희의 전력을 두고 그가 중위로 제대했기 때문에 친일혐의가 미미하다거나, 또는 극히 짧은 '젊은 날의 방황'으로 변호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그가 거물 친일파로 성장하기에는 일본의 패망이 너무 일찍 찾아왔을 뿐이다. 특히 박정희가 일본 파시즘의 꽃이라 할 제국군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대통령 박정희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그리고 통치 형태에는 이 시기 그가 체득한 일본파시즘의 논리가 깊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했다. 극우주의에서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유사시에 군부 내 좌익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전개할 임무를 받았으나, 여순사건을 전후해 김창룡이 이끄는 육군 특무대에 발각 검거되었다. 박정희는 군부 내의 좌익 명단을 제공하는 대가로 목숨을 부지했으며, 군부 내 좌익은 박정희의 자백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가치관을 떠나서 보자면 박정희는 숱한 동료의 목숨을 판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군문을 떠난 박정희는 6`25전쟁을 계기로 군에 복귀했다. 그리고 5`16쿠테타를 통해 마침내 권력을 장악했다. 이 때 박정희가 내세운 혁명공약 제1조는 "반공을 국시로 한다"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에서 공산주의자로 그리고 다시 반공 극우주의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끝없는 변신에는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개인의 생존 본능과 권력욕 만이 유일한 동기였다 할 수 있다.

한편 5`16쿠테타는 결코 그 주역들이 말하는 주관적인 "구국의 일념"과 거리가 멀었다. 이미 박정희는 4`19가 일어나기 전 세 번이나 쿠테타를 준비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사정이 뜻대로 되지 않아 쿠테타를 결행하지 못하다가 4`19를 맞이했고, 4`19 이후 이른바 혼란정국을 틈타 쿠테타를 통한 군사통치의 서막을 열었다.

그런데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4`19 이후 정국 혼란이 일시 있기는 했지만 점차 사회질서가 잡혀가고 있어 군사쿠테타를 결행할 명분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사회가 혼란하다고 해서 군인이 쿠테타에 나서야 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오히려 박정희는 쿠테타를 거듭 모의하다 정부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다. 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쿠테타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켰을 뿐이다. 5 16은 "역사의 필연"이 아니었다.

문제는 박정희는 군부쿠테타(군의 정치 개입)를 전혀 부당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군국파시즘 아래에서 청년 장교로 지낸 박정희는 메이지유신과 소와유신을 매우 높게 평가했으며, 그 자신이 군국파시즘의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정당정치와 대중의 다양한 여론을 사회 혼란으로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국가의 '적'으로 설정한 일본 우익의 사고방식은 박정희의 그것과 동일했다. 사회혼란을 군부가 일시에 제거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중심으로 국가를 개조한다는 군국파시즘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 5`16군사쿠테타였다.

박정희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6`25전쟁 이후 국민 사이에 높아진 냉전 의식과 자신의 좌익 혐의의 불식 그리고 남한을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드려는 미국의 의도가 맞물리면서 등장한 것이다. 박정희의 반공은 쿠테타의 명분이자 정략적인 것이며 그 바탕에는 파시즘과 메이지유신의 환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애초부터 "국시 반공" 안에는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었다. 민주주의는 사회 혼란과 북한의 적화통일을 가져올 '남한 자멸의 요소'로 파악되고 있었다. 5 16쿠테타는 이미 유신쿠테타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 유신체제 : 총체적 후진성의 구조화


20년 가까이 유지된 박정희 지배체제는 유신체제를 통해 그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었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유신체제가 불가피했다든가, 유신체제가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고도성장을 마련한 박정희의 '경제치적'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하게는 유신체제를 한국 민족주의의 발로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독재정치란 것은 하나의 상식이므로, 여기서는 유신체제가 어떤 속성을 지녔으며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하겠다.

10월유신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박정희가 남북통일을 악용해 영구집권을 꿈꾼 제2의 쿠테타였다.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국민들에게 통일의 환상을 불러일으킨 후 통일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유신을 선포했다. 그러나 10월유신은 평화통일을 앞당기기는 커녕 오히려 남북의 냉전구조만 강화했고, 총력안보란 구실 아래 유래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유신체제는 1930년대 일본 파시즘의 지배원리와 '근대화론'을 접합시킨 '일본파시즘의 한국적 변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신(維新)이란 용어 자체가 일본의 메이지유신, 소와유신에서 따온 것이며, 유신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구조와 통치체제의 근본 원리 그리고 수많은 정책들이 일본 파시즘의 그것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반상회(班常會)'는 조선인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애국반'이,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는 천황의 "교육칙어'와 "황국신민의 서사'가 연상될 만큼 그 연결이 자연스럽다. 박정희가 주창한 총력안보체제와 학도호국단과 교련 그리고 극단적 배외주의 또한 일제 파시즘의 정책과 동일했다.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지도자 양성책은 일제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 신촌(新村)운동과 농촌 중견인물 양성책에서 시사를 받은 것이었다.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극단화시켜 국가주의적 전시통제체제를 강화하고 이를 개인의 권력 강화로 귀결시키는 유신체제에는 파시즘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통해 우리 사회를 통치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병영국가로 재편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아의 확립 대신 국가(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을 오로지 요구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이어주는 명령계통의 국가기구와 어용단체만 존재했을 뿐,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가차없는 박해만 따를 뿐이었다. 박정희시대에 '시민'아닌 '재야'라는 독특한 저항진영이 형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4`19 이후 막 피어나던 우리의 시민사회는 태어나기도 전에 박정희 국가주의에 의해 태아살해된 것이다.

물론 유신체제가 일본 파시즘을 모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본 파시즘과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유신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구조와 통치의 근본 원리 그리고 여러 정책이 일본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남한사회가 다시 제국군인출신의 대통령에 의해 일본 파시즘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조국근대화'의 원리로 강요당했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였는가


박정희의 반미감정 또는 핵개발로 대표되는 자주국방론을 두고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것도 이만저만 곡해가 아니다. 박정희가 미국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 16쿠테타 이후 박정희는 미국의 쿠테타 승인과 각종 지원을 얻기 위해 출발부터 미국의 대외노선과 지도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가 미국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터뜨린 시점은 유신체제가 등장하면서였다. 자신이 영구 집권으로 가려는 길목에서 이를 문제삼는 미국의 간섭이 거세어지자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제3세계의 반미주의나 고전적인 민족주의와는 그 동기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설령 그가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국가주의가 유신체제를 받치고 있는 한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반동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화통일 그리고 자주권의 회복과 민중 주체의 사회 발전을 주장한 진보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유신체제의 정반대편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박정희가 "민족주체성을 함양"한다고 미풍양속 부흥, 특히 충효사상을 들고 나온 것도 민족주의 또는 민족문화와 무관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가부장적 유교이념을 천황제 파시즘으로 연결시켰듯이, 박정희 또한 봉건적 충효사상 등 중세의 유령을 전통문화, 미풍양속이란 이름으로 부활시켜 국민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일본 제국주의 대신 박정희가 주체로 등장했을 뿐 그 문화적 속성은 일본 파시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박정희와 그 이데올로그들은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고 부르면서 그 정당성을 우리 역사 속에서 끌어내기 위해 수많은 전통을 고안하고 찬미했다. 이 또한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민족문화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예를 들어 화백회의와 정사암제도와 같은 만장일치제의 귀족합좌회의는 일인 후보에 대한 찬반을 묻고 백 퍼센트 가까운 지지로 선출되는 "체육관 대통령"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각광받았다. 박정희가 추구한 전통은 대개 이런 따위였다.

박정희의 대중문화정책은 검열과 규제를 앞세운 처벌주의였으며 그 기준 또한 작의적이었다. 일례로 우리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아침이슬"이나 "행복의 나라로"와 같은 노래는 가차없이 금지 처분을 받았다. 앞의 노래는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가사의 "붉은"이라는 단어가 용공의 혐의를 받은 것이다. 뒤의 노래는 지금 대한민국이 행복한데 여길 두고 또 어떤 행복의 나라를 찾아간다는 심산이냐는 지배층의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박정희 시기 시작된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은 가부장제 획일주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경찰이 자와 가위를 들고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박정희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미국의 버릇없는 젊은이의 못된 문화라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조건 배척하고 자신을 기준으로 한 사회의 문화적 내용을 전단하려는 문화적 독단을 민족문화의 보호육성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곤란하다. 결국 그가 용인한 것은 자신이 익숙했던 유교 가부장제와 파시즘 문화였다.

유신체제는 당대에만 악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각종 관변단체 특히 제도화된 장치를 통해 자라나는 세대마저 파시즘형 인간으로 훈육하려고 했다. 규율과 복종정신의 내면화를 통해 민주적으로 훈련받아야 할 학생층은 정반대의 길을 강요받았다. 그가 만든 각종 유신체제의 보조 기구는 박정희가 사라진 지금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아 일상 속의 파시즘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아직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 개발독재의 어두운 그림자


박정희가 걸어온 길이 이렇듯 뚜렷하게 부정적이기에 그의 추종자들 조차 박정희의 공로로 자신있게 드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이었다. 필자 또한 어찌되었건 박정희 집권기에 뚜렷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동의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내용과 질을 따져보면 성장의 그래프보다 더욱 깊게 그 부작용과 후유증이 남겨져 있다. 쟁점이 되는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부 학자들은 박정권이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워 한일협정을 맺은 것을 잘한 일이라고 추켜 세운다. 이 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느냐고 이들은 반문한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박정권이 한일회담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권이 한일회담을 '잘못된 시각'에서 시작했고, 이들의 부도덕하고 무능한 외교로 말미암아 한일협정은 '차라리 추진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문제삼는 것이다.

박정권이 일본정부로부터 제공받은 유무상 5억달러의 청구권 자금은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 우리가 겪은 피해에 비하면 극히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게다가 박정권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범죄와 민중의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도 묻지 않은 채 36년의 피해보상을 서둘러 매듭지었다. 그 결과 '정신대' 문제, 원폭피해자, 재일동포 지위 등 일제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가 한 가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한일회담을 이렇게 졸속으로 추진한 근본 원인은 쿠테타 이후 볼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정권의 무능함을 일본의 경제 지원으로 메꾸려는 조급함과 정권 담당자가 지녀야 할 역사의식의 부재에 있었다. 사실 한일회담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제대로 못받았으니 무책임외교, 무능력 외교의 본보기로 지적되어야 한다. 게다가 한일협정을 전후해 일본으로부터 거액이 공화당창당자금의 뒷돈으로 제공되었다는 의혹은 도덕성의 시비마저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편 한일회담은 한국, 일본, 대만을 연결해 동아시아 반공라인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떠밀려 더욱 급하게 추진되었다. 박정권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쿠테타의 합법성을 구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때문에 한일회담은 우리의 내재적 요구와 주체적인 태도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집권 시기 경제성장은 베트남전이라는 또 다른 성장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박정권이 베트남 참전을 결정한 것은 경제개발의 재원을 조달하고 미국의 하위동반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은 프랑스-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100년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려는 베트남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따라서 한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해야 할 명분은 없었다. 식민지의 고통을 겪은 우리가 남의 나라 독립운동에 개입하러 간다는 것도 온당하지 않으며, 젊은이의 피를 대가로 성장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월남전 특수'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고도성장을 논하기 전에 한국 군인과 월남 민중의 피의 희생이 먼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경제성장을 위해 월남파병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면, 일본 우익이 과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것을 일본 경제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얘기하는 제국주의 논리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최근에는 박정희의 치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주목하기도 한다. 새마을운동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농민에게 심어주었으며, 성공적인 농촌개혁운동이었다고 격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이 시기 농촌경제를 살펴보면 새마을운동이 과연 농촌을 살렸는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박정희정권이 몇 몇 성공 사례를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서 그 성과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농가경제의 파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새마을운동은 그 경제적 동기보다는 박정희정권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농촌에게 구하고, 정치적으로 낙후된 농민을 동원 통제하려는 보다 거시적인 통치전략 측면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일제시기 농촌진흥운동이나 신촌운동 그리고 농촌중견인물양성책이 그러했듯이, 새마을 운동 자체가 갖는 대내외의 거대한 정치적 선전`동원기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론은 국가가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해 경제의 틀을 짜고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어 이를 육성 지원하는, 국가주도 재벌 중심의 수출지상주의였다.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강력한 권력이 독재를 행사하는 것도 정당화되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휴유증은 엄청났다. 재벌의 정경유착과 부실경영, 한국경제의 미일의존성, 부와 소득의 불균형, 농업의 희생, 노동자들의 인간적 권리 말살, 만성적인 외채경제는 박정희가 주조한 경제구조의 핵심이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

박정희식 경제개발론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보와 경제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를 위해 인간의 모든 가치가 유보될 수 있다고 주장해, 인간을 오직 빵으로만 사는 동물적 존재로 돌려버렸다. 박정희가 민주화를 훼손시켰지만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좋다는 전도된 가치관으로 연결된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러한 전도된 가치관에 입각해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쿠테타를 하고 유신체제를 선포했다는 식으로 그를 억지미화하고 있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인정이 있고 이웃이 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향수, 저마다 소중한 추억을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바꿀수는 없다. 오직 '대망의 80년대'만을 기다리며 초인적인 인내력과 헌신적인 노동으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 온 박정희시대의 민중들에게 조촐한 술 한상을 차리지 못할 망정 그 가운데 호의호식하던 박정희를 기리다니 말이 되는가.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결코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없으며, 박정희의 고도성장을 찬양하기 전에 그 깃발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희생자에 대한 경의와 명예회복이 앞서야 할 것이다.

*** 결론 : 박정희기념관 건립 반대투쟁의 역사적 의미


박정희가 집권한 시대는 민족과 반민족, 민주와 독재, 그리고 통일과 반통일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치관이 투쟁하던 시대였다. 이 빛과 그림자의 투쟁에서 박정희는 언제나 반민족으로, 독재로 그리고 반통일의 화신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이 암흑의 지배 아래 수많은 친일잔재와 파쇼 세력이 기만적인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때로는 '박정희 신도'로 자처하면서 박쥐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박정희 집권기 구축된 권력집단이 자신의 기득권을 21세기까지 연장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상징화 작업이 바로 박정희 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은 자신의 허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보수세력을 끌어들이고자 이 기념사업에 적극 뛰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기념관 건립사업은 박정희 시기 그의 '공범'들과 박정희가 남겨놓은 관변 시스템에 유착한 세력 그리고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현 집권층의 권력욕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의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 엉키어 진행되는 추악한 권력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인권대통령으로 자처하는 김대중대통령이 이 사업에 적극 나서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대통령은 자신을 가해한 박정희를 "이미 용서"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지나 개인의 자격에서 가능할 뿐이다. 문제는 박정희는 김대중대통령의 '개인적 박해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한 시대 국민을 볼모로 삼은 역사의 죄인이랄 수 있다. 이런 박정희를 김대중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역사와 국민을 대표해 임의로 용서하고 게다가 기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속에 국민의 혈세 200억원을 박정희 기념사업에 바치는 것은 이만저만 월권이 아니다. 알량한 정권 재창출을 위해 한편으로 박정희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가해자를 기념하는 이 엄청난 역사의 기만을 어찌 두고만 볼 것인가.

박정희는 결코 기념할 대상이 아니다.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독재로 이어진 오욕의 20세기를 극복하고 21세기 민족의 새지평을 열기 위해 반드시 극복 청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더욱이 박정희는 2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면서 각종 국가기구와 관변단체를 통해 이른바 박정희이데올로기라는 파쇼적 가치관을 국민 속에 감염시켰다. 이제는 올바른 역사 반성을 통해 다시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우리의 가치관을 바로잡는 것이 시급하다. 지금은 박정희 기념사업이 아니라 박정희 청산사업이 시작될 때이다. 우리가 한 시대의 역사를 바르게 규정하지 못함으로써 전도된 가치관이 횡행하게 되면 언제든지 제2, 제3의 박정희 기념사업과 그의 후예들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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