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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김상진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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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방송 '옴부즈맨 라디오, 지금은 청취자 시대’ (일 오후 6시-6시30분)
[PD리포트] 서울대 최종발표에 대한 언론보도 실태 분석
진행 : 홍숙영 (미디어 비평가, 파리 2대학 박사과정)
취재 : 노광준 (경기방송 제작2팀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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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언론이 너무 앞서 나간다”
“황우석 영웅만들기에 몰두하더니 이번엔 황우석 죽이기로 우왕좌왕한다”
길거리에서 만난 수도권 시민의 65%는 이처럼 언론보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인 이슈를 갖고 이야기를 나눠보죠.
지난 10일 온 국민의 눈과 귀는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결과 보고로 쏠렸습니다. 황교수 의혹에 대한 권위있는 기관의 조사결과이니 만큼 상당부분의 의혹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는데요, 하지만 결과보고 이후 의혹은 오히려 커져갔고, 언론보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광준 프로듀서가 정리합니다. 안녕하세요?
노) 안녕하십니까?
지난 10일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29일간의 조사 활동을 총정리한 최종보고서를 발표할 때, 이에 대한 언론보도는 경쟁을 뛰어넘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했는데요, 각 방송사 프라임 시간대 뉴스의 절반이상이 서울대 뉴스로 채워졌고, 다음날 조간신문 지면 역시 서울대 조사위원회 발표로 꽉꽉 채워졌습니다.
컷) 방송사 주요 뉴스컷
진행) 총체적 조작, 끝없는 거짓말...이렇게 황교수 관련 뉴스가 넘쳐났었죠?
노) 그렇습니다. 실제로 최종발표가 있었던 1월10일, KBS 9시뉴스는 31개의 기사 가운데 14개의 기사를 서울대 최종발표 뉴스로 채웠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45%의 비율이었고요, SBS 8시 뉴스는 이날 30개의 기사가운데 17개로 절반이 넘는 57%를, 그리고 MBC 뉴스 데스크는 전체 34개의 기사 가운데 21개의 기사로, 무려 62%를 단일사안에 배정해 마치 탄핵정국을 방불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다고 이렇게 넘쳐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정작 국민들이 궁금해하던 핵심쟁점에 대한 보도는 궁색하리만큼 부족했고, 의혹 또는 논란으로 처리되어야할 애매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결과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히고 ?暉薦獵 논문조작 의혹이 마치 황교수의 1인 사기극으로, 다시말해 재현실험을 허용할 가치조자 없는 범죄행위로 단순 규정되는 듯한 보도양상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 취재팀은 언론보도가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지...어떤 부분에서 생각해볼 점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KINDS 뉴스 검색을 통해 1월10일과 1월11일 오전까지의 신문과 방송기사를 분석해봤습니다.
진행) 구체적으로 언론보도의 문제점...어떤 부분이 제기되고 있습니까?
노) 가장 먼저 황교수팀의 원천기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대다수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논문조작? 잘못된거다. 하지만 원천기술이 있다면 재현기회라도 줄수 있지 않나“
이런 여론속에서 이날 서울대 최종보고서에 담긴 황교수팀 원천기술에 대한 평가 부분은 앞으로 재현실험 허용 논란이나 특허를 둘러싼 논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주목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언론 역시 원천기술과 관련된 기사를 뉴스 시작하자마자 두 번째 기사로 올려놓을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는데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최종발표를 맡았던 서울대 정명희 조사위원장이 정작 최종보고서에 기록된 내용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발표해버린겁니다.
진행) 똑같은 주제에 대해 보고서에 있는 내용과 발표를 한 내용이 상반된다??
노) 그렇습니다. 보고서에서는 황교수팀의 배반포 관련 원천기술에 대해 독창적이며 지적재산권 확보도 가능한 기술로 평가하고 있는데, 정작 발표자인 정명희 위원장은 이를 부정하는 내용을 마치 공식입장인 것처럼 발표한 겁니다. 그리고 절대다수의 언론은 이러한 헤프닝을 보도조차 하지 않았을뿐더러 황교수팀 기술력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발표자 정명희 위원장의 말만을 인용해 ‘황교수팀 원천기술도 없었다’는 식의 단언을 해버린겁니다.
실제로 저희 취재팀이 확인해본 결과 서울대 조사위의 최종보고서에 실려있는 황교수팀 원천기술에 대한 평가는 이랬습니다.
컷) 보고서 39페이지
핵이식에 의한 배반포 형성 연구 성과에 대한 평가
......현재까지 황교수팀을 제외하고 사람에서 핵이식을 통해 배반포를 형성한 최초의 기록은 2005년 8월 뉴캐슬 대학의 스토이코비치 박사팀의 결과보고가 유일한 점을 미루어볼때 위와 같은 업적은 그 독창성이 인정된다.....
보고서 40페이지
......배반포 형성 연구 업적과 독창성은 인정되며 관련 지적재산권의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진행) 그러니까 비록 줄기세포를 확립하지 못해 실용적인 가치는 떨어지지만, 배반포 형성까지의 성과만으로도 독창성과 지적재산권의 확보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군요?
노) 그렇습니다. 사실 이 내용은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황교수 파문이 일어난 뒤에도 미국의 뉴스위크지를 비롯해 황교수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온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의 경우에도 황교수팀의 배반포 형성까지의 연구성과는 독창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줄기세포의 전단계인 배반포까지 형성한 것 만으로도 대단하다는 반응이고 세계 최고수준인 국내 생명공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반영해 최종결과 보고서에 이같은 내용이 담긴 건데요,
그런데 정작 최종보고서를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는 장소에서 정명희 위원장은 보고서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발표하게 됩니다. 들어보시죠
컷) 서울대 정명희 조사위원장
.....황교수팀이 핵이식조건을 개선하여 사람난자의 배반포 형성에 성공하였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다.
다만, 현재 이 기술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연구실들이 있어,더 이상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진행) 앞서 보고서 내용과는 뉘앙스가 상당히 다르네요?
노) 이를 단순한 발표실수로 보기에는 어려웠던게, 정명희 위원장은 공식 발표가 끝난뒤 가진 질문 응답시간에 이같은 주장을 거듭 밝힙니다. 들어보시죠.
컷) 서울대 정명희 조사위원장
......KBS 추적60분 PD ***입니다. 보유하고 있는 연구실들이 어딥니까?
......뉴캐슬 대학입니다. 논문도 있습니다.
진행) 그렇다면 서울대가 논문까지 확인했다는 영국 뉴캐슬대학의 기술수준.이게 어느정도 수준이 되는지를 알아보는게 황교수팀 원천기술의 독보성을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되네요?
노) 영국 뉴캐슬 대학이 배반포 형성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건 맞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을 뉴캐슬 대학 독자적으로 확보한 것이 아니라 이미 황우석 교수팀이 보유해서 2004년 사이언스 논문에 기고한 방식을 주요 모델로 해서 실험에 성공했다는건데요, 영국 과학자들의 논문을 실은 학술지는 편집자 메모를 통해 이 연구의 독창성은 황우석 교수에게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더구나 뉴캐슬 팀의 연구가 발표됐을 2005년 5월19일 당시 영국 BBC 방송 인터넷판의 보도내용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확인됩니다.
컷) BBC 뉴스
영국 과학자들이 복제된 인간배아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이는 지난해 30개의 복제된 인간배아를 만들어낸 한국 과학자들의 행보를
뒤따른 것으로 BBC 뉴스는 발표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다.
노) BBC 인터넷판을 살펴보면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뉴캐슬 팀이 황교수팀의 기술을 모델로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로 나타나고요, 더구나 배반포 확립 개수면에서 황교수팀이 30개를 만든 반면 뉴캐슬 팀은 1개에 그쳤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뉴캐슬 연구팀의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BBC 뉴스를 비롯한 외신보도내용인데요, 스페인 정부가 뉴캐슬팀에게 3억스위스 프랑, 우리돈으로 약 2300억원의 자금지원을 약속하면서 그정도 기술이면 스페인으로 와서 연구하라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뉴캐슬 팀의 스토이코비치 박사는 앞으로 스페인에서 250명의 연구원과 함께 2300억원의 자금지원을 받으며 최신연구실에서 일하게 될 예정으로 상당한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다는데요, 뉴캐슬팀이 외국에서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다면 뉴캐슬에게 사실상 기술을 전수해주다시피한 황박사팀의 배반포 형성기술의 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죠?
진행) 어쨌든 분명한 것은 황교수팀의 배반포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독창적이고 가치가 있는 기술이라는건데요, 언론의 원천기술에 대한 평가는 이와는 정 반대였죠?
노) 그렇습니다. 원천기술이 뭐고 뉴캐슬 팀이 이렇더라는 분석기사는 제쳐두고서라도요 정명희 위원장의 발표내용과 보고서 내용이 다르더라는 단순 사실보도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은 보고서 내용과는 달랐던 정명희 위원장의 말만을 인용하면서 황교수팀의 원천기술은 없었다는 단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컷) 원천기술에 대한 언론보도 내용
한겨레 “황우석 원천기술도 없다”
한국일보 “황교수팀 원천기술도 없다”
경향신문 “편법 총동원...줄기세포 없이...” 원천기술은 없다
서울신문 “원천기술 없어...스너피는 진짜”
국민일보 “맞춤형 줄기세포 1주도 없어... 원천기술도 독보적이지 않다”
중앙일보 “원천기술마저 없다니...허탈”
오마이뉴스 “결국 원천기술은 없었다”
(부제) 동물복제기술은 국제적 경쟁력 보유
SBS 8시뉴스 “황우석 교수팀, 원천기술도 없다”
(기자분석) 결국 서울대 조사위는 황교수팀의 기술이 전혀 독창적이지 않은 복제기술 뿐 이었다고 평가한 셈이다.
MBC 뉴스데스크 “줄기세포 원천기술 없다”
(기자분석) 무의미한 핵이식 기술과 상태가 불량한 배반포, 그리고 어디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없는 황교수팀의 줄기세포. 조사위는 결국 황교수팀의 원천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진행) 이 와중에서 서울대 최종발표의 문제점을 보도한 언론도 있었죠?
노) 인터넷 신문 2군데, 그리고 방송사 1군데, 이렇게 딱 3군데만 서울대 보고서 내용과 발표내용이 다르다는 점을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정명희 위원장의 발표내용 뿐 아니라 서울대 최종보고서 원문을 인용해서 객관적으로 황교수팀의 원천기술을 평가하고자 시도한 언론사 역시 일간지 2개, 인터넷 신문 1개에 불과해서 이렇게 보도한 언론사가 신기할 따름입니다.
(참고자료 : 시간관계상 방송이 되지는 않은 부분)
인터넷 브레이크 뉴스 “서울대, 황교수 배반포 독창성 인정”
노컷뉴스 “황우석 논란, 연구성과 둘러싼 불씨 남아
-황교수 배반포형성에서 부분적으로 성과 낸 것으로 나타나”
동아일보 (기사내용)
“하지만 배반포 형성기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므로
앞으로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는
주요 핵심기술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조선일보 (기사내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위는 2단계 기술에 대해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데일리 “조사위 발표문과 최종보고서간 뉘앙스가 다르다?
- 발표문에선 더 이상 독보적이지 않다. VS 최종보고서에선 업적 독창적.
KBS 9시뉴스 (기사내용)
정명희 서울대 조사위원회 위원장은 그러나 이같은 기술은 독창적인 기술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조사위 보고서는 배반포 단계까지 간 것은 독창성이 인정된다고 밝혀 이같은 정반대의 언급이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정위원장의 소신인지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진행) 네, 원천기술에 대한 평가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국제적인 특허분쟁이나 지적재산권 논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한 언론보도가 필요했는데 아쉽네요.
논문조작과 관련해서는 어떻습니까?
노) 논문이 잘못됐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고요, 문제는 2005년도 사이언스 논문, 그리고 2004년도 사이언스 논문의 결과와 근거자료가 조작되기까지 누가 어떤 경로로 조작을 했는지, 그리고 바꿔치기가 있었는지 여부가 핵심쟁점이었는데요, 아쉽게도 서울대 최종보고서 안에는 명쾌한 해답보다는 물음표와 궁금증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조사위원회가 검사를 의뢰해본 결과 논문에서 만들었다는 줄기세포는 없었고, 대신 남아있는 줄기세포 모두가 노성일 이사장이 운영하는 미즈메디 병원의 수정란 줄기세포인 점이 명확하게 확인됐음이 보고서에 담겨져있습니다. 바꿔치기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 대부분의 언론은 이러한 바꿔치기 의혹을 정명희 위원장의 “바꿔칠 줄기세포도 없는데 어떻게 바뀌치느냐”는 말만을 인용하며 일축하다시피 했습니다.
진행) 검찰수사가 진행중이니까 차분히 지켜볼 대목이고요, 난자제공과 관련한 언론보도는 어땠습니까?
노) 난자제공, 특히 연구원의 난자제공 부분은 생명윤리와 연구윤리, 그리고 황우석 교수의 잦은 거짓말 의혹과 맞물려 있는 아주 민감한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1월3일 방영된 MBC PD 수첩에서 황교수팀의 핵심연구원이었던 박을순 연구원의 난자제공과 관련한 각종 의혹들이 제기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미국에 있는 박을순 연구원을 화상면담했던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최종보고서 내용이 궁금했는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서울대 조사위원회에서는 박을순 연구원과의 면담을 통해 2가지의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언론보도를 통해 잘알고 계시는 내용, 황우석 교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부분이고요
진행) 연구원의 난자제공을 사전에 알지도 못했다고 황교수가 주장했는데, 사실은 황교수가 사전에 승인을 했고 병원까지 동행했다는 거죠?
노) 그렇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로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밝혀낸 새로운 사실이 있었다는겁니다. 일설에는 박을순 연구원이 실수로 난자를 깨뜨려 그 죄책감 때문에 황교수가 난자제공을 강요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에 대해 박연구원은 사실무근이라고 진술했습니다.
PD수첩에서 제기했던 논문저자에서 빼겠다며 황교수가 난자제공을 강요했다는 의혹도 박연구원은 사실이 아니라고 진술한 겁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 내용입니다.
컷) 서울대학교 최종 보고서 33페이지 : 연구원 난자제공 관련 강압성 여부
아무개 전연구원은 자신이 실수로 난자를 깨뜨려 그 죄책감 때문에 난자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진술하였다.
논문저자로 참여하려는 걱정 때문에 난자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소문도, 당시 실험 자체가 너무 진척이 안 된 상태여서 논문이 나갈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아무개 전 연구원의 진술에 의하면 2003년 1월 실험부진과 부족한 난자 문제 등으로 향상된 결과가 보이지 않자, 황교수와 실험진행여부에 관해 걱정하다가 실험자로서 자신의 난자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행) 방금 들은 보고서 내용을 들으면 당시 연구원의 난자제공은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데요, 언론은 황교수의 거짓말쪽에만 포커스를 맞췄다고도 볼 수 있네요
노) 그렇습니다. 팩트의 문젭니다. 한명의 핵심 증언자가 그전에는 몰랐던 두가지 사실을 공표했다면 그것이 서울대 보고서안에 실려있는 내용이라면 언론은 두가지 팩트를 다 다루던지, 최소한 두가지 팩트를 균형있게 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언론은 황우석 교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팩트는 크게 키우고, 반면 난자제공이 자발적이었다는 팩트는 보이지도 않게 숨겼습니다.
결과적으로 뉴스를 접하는 시청자들은 황우석 교수는 거짓말쟁이인 만큼 난자제공도 분명히 강압적으로 강요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대목인데요, 특히 저희 취재팀은 MBC의 보도태도를 주목했습니다. 다른 방송은 몰라도 MBC는 PD수첩을 통해 제기한 난자의혹에 대해 서울대의 조사결과를 가감없이 보도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진행) MBC 뉴스데스크라면 PD수첩 방영내용과 관련된 서울대 조사위 발표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전달을 해야했을텐데요?
노) 하지만 취재팀이 1월10일 MBC 뉴스데스크의 난자제공 보도를 분석해본 결과, 황교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팩트만 강조될 뿐, 또 다른 팩트, 즉 PD수첩 방영내용의 일부는 사실이 아니었다는 팩트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PD수첩에선 이런 의혹을 제기했는데 실제 박을순 연구원이 말한 내용은 이러이러하게 다르더라...이정도는 명시를 했어야 했는데요..보도내용은 딴판이었습니다. MBC 보도내용 들어보시죠
컷) MBC 뉴스 데스크
황우석 교수는 여성 연구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발적으로 난자를 제공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연구원들을 상대로 난자기증 성명을 받았고
또 난자채취 시술현장에까지 동행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략)
PD 수첩이 연구원 난자제공 문제를 제기한 것은 지난해 11월,
황교수의 계속된 말바꾸기로 진실이 밝혀지는데 두달이 걸렸습니다.
(진행) 예, 지금까지 황우석 교수 연구의혹 관련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발표를 둘러싼 언론보도의 문제점 짚어봤습니다. 노광준 프로듀서 수고하셨습니다.
박정희정권의 인권탄압과 그 부정적 유산
윤경로(한성대 사학과)
1. 한국 근현대사와 인권문제
인권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자신의 생존과 존엄 그리고 자기 발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개인의 기본권이며, 천부의 권리이기도 하다. 제도적으로 볼 때 서구의 인권선언의 기원은 국왕의 무차별한 인신 구속을 제한한 영국의 [마그나카르타](1215년)로 거슬러갈 수 있다. 서구의 인권보장은 마그나카르타에서 보듯-비록 국왕이 귀족의 압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이기는 했지만-국가권력의 작동을 일정하게 매개하면서 제도화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1789)이나 유엔의 [세계인권선언](1948년)을 통해 1nr 차원을 넘어 세계적 규모에서 인권보장의 당위성과 제도화가 공인되었다. 그 후 다양한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에 의한 구체적인 형태로 인권의 범위가 넓혀졌으며 그 권리 보장을 규정했다. 그러나 우리 근현대사를 돌아보자면 인권운동은 국가기구를 통해서라기보다 국가기구의 바깥에서, 그리고 국가 기구의 탄압 속에서 피로 점철된 일종의 지하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각종 인권을 보장한다고 명문화하더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사문화되는 경우가 지금도 적지 않으며, 인권보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 또한 국가가 아니라 국가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도 인권유린의 상당 부분은 국가 기관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인권상황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군부독재가 사라지고 민간정부가 들어서 민주주의를 내세우더라도 그 민주주의는 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절차나 권력 배분(삼권분립)과 관련된 사항에 집중되어 있을 뿐 민주주의를 아래로부터 뒷받침하는 기본 사상인 인권에 대해서는 권력집단 자체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외형적인 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실생활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개인 권리의식과 공동체의 민주적 윤리는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기현상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실생활의 자질구레한 인권상황의 개선은커녕 먼저 국가 자체에 의해 자행되는 인권유린이 아직도 문제가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멀리 우리 20세기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로 시작한 점, 그리고 그 통치원리의 계승자인 박정희의 가혹한 유신체제와 그 후계인 전두환, 노태우정권의 집권한 70여 년 동안 행해진 국가테러리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정희가 구축한 유신체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인권문제에 대한 총체적 후진성을 구조화시킨 직접적인 장본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국가테러리즘의 전개과정
한국 국가테러리즘의 근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자신의 정부를 갖지 못한 채 일제의 파시즘의 폭력정치에 의해 일체의 권리가 무시되고 복종과 굴욕의 노예적 상태를 강요당했다. 항일운동세력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조선 민중 전체에 대한 노예교육과 강압적 정치 그리고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한 수립한 국가총동원체제를 통해 조선 민중 전체에 대해 무차별한 탄압과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것은 조선 민중이 일체의 민주주의적 정치훈련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식민지 노예의 길을 강요받아 인권문제 등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의식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민중을 탄압하는 데 동원되거나 앞장섰던 친일 세력을 친미세력으로 전환 흡수했다. 이 결과 미군정은 이들이 권력의 비호 아래 광범위한 인권유린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 주었으며, 인권문제가 국가기구와 긴장관계를 이루며 재생산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특히 미군정 자신이 또한 사회주의 배제전략과 민족주의 세력의 약화를 기도해 군정 차원에서 폭력을 동원하거나 부일세력의 이른바 '타공투쟁'을 빙자한 테러행위와 인권유린을 방조했다. 이승만 정권 시기 인권 탄압은 국가기구 및 그와 공식 비공식으로 관련된 준관변단체에 의해 공공연한 테러와 고문으로 이루어졌다. 반공을 앞세운 헌병사령부와 국군 특무대 그리고 경찰은 친일세력의 온상지였다. 이들은 과거의 친일 경력을 감추고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반공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타공전선'에서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물론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심지어 충성경쟁을 벌이면서 실적을 올리기 위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과 조작으로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특히 이승만정권은 폭력을 제1의 실천원리로 삼는 극우청년단체와 정치깡패를 관변으로 관리하면서 무법의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반공을 내세우며 일제시기 악법의 대명사였던 반공법, 치안유지법을 존속 또는 개정해 인권탄압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인권 유린이 악법에 의해 그리고 극단적 반공에 의해 정당화하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악법은 결국 국가 기구와 공무원이 자의로 인권 유린을 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시켜 주었고, 친일 계통의 경찰과 군의 하급 수사관원들은 이권탄압을 통해 일제시기 악명 높은 고문을 인권탄압의 주요한 수단으로 해방 조국에 계승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의 인권 탄압은 기본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권력자와 권력의 하수인들의 자의적인 탄압과 반공주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면 인권탄압은 탈법이 아니라 합법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두어 대통령이 초헌법적으로 권력을 무제한 행사할 수 있게 보장함으로써 국가테러리즘이 헌법-체제- 차원에서 완성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1961년 5.16쿠테타 직후 성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시기, 즉 군정시기이다. 이 시기 반공을 국시로 한 혁명의 이름 아래 일체의 정치 활동과 비판이 금지되었다. 인권의 측면에서 보자면 깡패소탕령, 국민재건운동 조차 혁명을 빙자한 인권유린의 한 예라 할 수있다.당시 일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 깡패 소탕령과 국민재건운동은 바람직한 인간으로의 선도와 재창조라기 보다는 국가의 폭력과 공권력에 의한 군사적 규율을 사회 전반에 뿌리박게 하는 것이었다. 실제 진행 과정에서 깡패들을 속박한 채 팻말을 걸고 가두행진을 시킨 일, 재건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구타와 다양한 인권 탄압 그리고 재건운동 이후 이들 깡패조직을 권력의 말단 행동대원으로 재배치하는 과정을 볼 때 인권유린의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반공을 국시'라 한 데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반공산혁명전략과 맞물려 있고 군이들이 정치에 나서는 명분이었지만 이 또한 향후 군사독재에 대해 저항하는 일체의 민주화운동을 반공의 이름 아래 탄압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역사가 실제 이를 증명했다. 두 번째 단계는 1965년 한일회담반대 시위 이른바 6.3사태에 대한 박정희정권의 물리적 대응이다. 한일회담은 전국민적 반대를 불러 일으켰고 실제 강력한 대중적 항의와 시위가 일어났다. 박정희정권은 유례없는 전면적 탄압을 통해 국민의 반대를 힘으로 제압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한일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결과 태평양전쟁의 패배로 물러났던 일본이 다시 경제력을 앞세워 한반도에 상륙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은 미일 예속상태를 구조화 시켰다.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 한미일 이른바 삼각공조체제로 냉전체제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세 번째는 3선개헌, 유신체제의 선포로부터 유신체제의 몰락까지이다. 박정희정권의 국가테러리즘이 체제차원에서 제도화되고 전면적인 인권 탄압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다음 장에서 박정희가 완성한 국가테러리즘과 극렬한 인권탄압을 뒷받침한 긴급조치권을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3. 유신체제 아래 인권탄압
1) 긴급조치 제1호 유신체제기 박정희정권의 인권 탄압은 탈법, 불법의 차원을 넘어 헌법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을 명문화하고도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헌법에 두어 사실상 인권탄압을 헌법차원에서 보장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잇는 다양한 관계망 또는 국가로부터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반 장치를 제거하고 오로지 국가기구-관변단체-개인으로 하향지시형 관계망만 두었다. 개인독재를 보장하는 헌법, 국가와 지도자의 동일시, 그리고 국가에게 충성과 의무를 다하는 일방적인 관계망과 국민윤리 속에서 4.19 이후 분출하던 시민사회는 박정희에 의해 태아살해되고 말았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가 선포된 이래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제9호가 해제될 때가지 만 2천 1백 59일 간을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에 의해 국민의 자유는 완전히 억압되었다. 유신헌번 53조의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일반적으로 헌법에 기재되는 천재지변이나 전시의 긴급조치권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유신헌법이 모방했다는 프랑스5공화국 헌법 16조의 긴급조치권도 박정희의 긴급조치권과 비교하면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프랑스의 그것은 헌법 비상조치의 선포 요건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사전상의의 대상을 확정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공권력에 대하여 최소의 기간 내에 그 사명을 다하도록 하는 다양한 제한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유신헌법의 그것은 1) 사후적.진압적 비상조치가 아니라 사전적.예방적 조치까지 할 수 있고, 2) 비상조치권의 적용 범위 효과가 지극히 광범하며, 3) 그 적용 기간이 긴급조치 9호의 경우 무려 4년 7개월이나 존속해 유신체제 절반의 기간을 점했으며, 4)국회의 집회나 소집가능성 여부에 관계없이 발동될 수 있고 5) 국회나 법원에 의한 통제가 거의 인정이 되지 않았다. 6) 결국 대통령 개인의 퍼스낼러티와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자의적으로 모든 제한없이 발동할 수 있는 일종의 폭력의 백지위임이었다. 실제 긴급조치의 대부분은 공안시국사건과 직접 맞물리면서 이에 대한 처벌로서 발동되었다. 긴급조치 제1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②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한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③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④ 전 1,2,3호에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⑤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⑥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를 통해 헌법상 명문으로 규정한 개헌사항마저 아예 논의를 금지해 긴급조치권을 초헌법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처벌할 수 있으며 대단히 높은 형량을 두어 공포와 폭력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또 비상군법회의를 두어 위반자를 관할케 한 것은 사실 계엄상태를 의미했으며, "처단과 심판"은 이미 법적인 용어를 넘어서는 것으로 국민을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주어 일체의 저항을 사전에 무력화하려는 협박에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파쇼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서울대 문리대 선언문, 1973. 10.2) 긴급조치위반자는 국가보위라는 체제차원에서 고문과 속결주의 그리고 이른바 정찰제(검사의 판결구형량과 판사의 성고량이 일치하는 것)에 의해 최소한의 권리 주장도 하지 못한 채 무거운 중벌을 받았다.
2) 긴급조치 제4호
1974년 4월 3일에 발동된 긴급조치 제4호는 이른바 '민청학련사건'과 그 배후조직으로 지목된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2차인혁당사건)"을 탄압하기 위해 발동한 것이다. 여기서 민주화운동은 공산주의자의 불순한 책동으로 조작되었고, 수많은 "관제공산주의자"들이 시국사건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제 긴급조치는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각종 악법(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등과 결합해 냉전과 반공의식을 이용해 인권유린에 본겾적으로 나섰다. 이렇게 해 "반공"은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적으로 그 자태를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실제 민청학련 관계자들 또한 긴급 조치 4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제반 악법과 결부되어 중죄에 처해 졌다. 민청학련이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와 연결해 노동자 농민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는 억지 주장은 향후 산업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거져 나오는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투쟁과 기본권 요구를 공산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매도해 탄압하기 위한 서곡이었다. 실제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노동.농민운동은 반체제운동, 공산주의 운동으로 치부되면서, 이들의 정당한 주장은 반공의 거대한 벽에 부딪쳐야만 했다. 또 긴급조치 4호는 문교부장관이 학교를 폐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짐으로써, 학원을 권력의 시녀로 장악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밝혔다. 고문과 조작,그리고 사법당국의 인권유린이 겹쳐지면서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은 최악의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예로 기록되어져야 한다. 특히 인혁당 관계자들은 처절한 고문과 사건 조작 그리고 비공개에 가가운 재판 진행과 재판기록문의 변조를 통해 8명이 사형당하고 나머지 인사들도 중형을 선고받았다. 판결 하루 만에 도예종 등 8명을 사형을 집행했으며(15일 이내 집행하기로 되어 있으나), 유족들의 사체 인수를 거부하고 바로 화장시켜 고문의 흔적을 감추었다. 전 세계는 이날을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할 정도였다. 법적으로 신분이 보장된 변호사 또한 유신체제 아래에서는 그 권리가 무시되었다. 민청학련사건을 변호한 강신옥변호사는 법정모독제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3) 긴급조치 7호와 9호
긴급조치 1호와 4호는 그것이 선포된지 각가 225일, 142일만인 1975년 8월 23일 해제되었다. 박정희는 육영수피살사건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국민 사이에 죽은 자에 대한 추모와 자신에 일시적 동정의 기운이 일고 반일시위와 대북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유신체제반대운동이 주춤하자, "국민총화가 굳건히 다져졌음"을 보고 "적이 든든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긴급조치해제라는 은전을 "하사"했다. 그러나 긴급조치 4호가 해제된 이후 반체제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야당도 오랜만에 선명야당을 내건 김영삼이 당수로 당선되면서 재야가 야당정치권과 연결을 맺는 단게로 발전했다. 한편 박정권의 탄압에 대해 종교계, 재야, 학원, 언론, 문학계, 노동자, 농민의 반체제활동이 광법위하게 연합전선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제 박정권은 개별 저항세력이 아니라 사회의 전부문에서 반체제세력과 대결해야 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긴급조치 제7호와 제9호였다. 긴급조치 7호는 1975년 4월 8일 약 2천명의 고대생이 [석탑선언문]을 뿌리며 "민주헌정회복"과 [민우] [야생화] 구속자 등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일으키자 즉시 발동되었다. 긴급조치 7호는 고려대학교를 휴교에 처하면서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국방부 장관은 "병력을 사용하여 동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7호는 하나의 대학교를 대상으로 발동했다는 특징이 있으며, 군대를 동원해 학원을 장악하는 유례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한 지 35일이 지난 1975년 5월 13일 발동한 긴급조치 9호는 1호부터 7호까지 "그 모든 조치의 내용을 하나로 집대성하여 선포"한 것이었다. 그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차하는 행위 (나) 집회, 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도서.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당국의 지도.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비정치적 활도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도는 정치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9호는 당시 인도차이나의 역도미노현상. 즉 크메르, 월남의 공산화와 북한의 호전적 대남 노선이 적극화하는 국제적 정세에 위기를 느낀 박정권이 이를 국내 안보와 권력 유지에 적용한 것이었다. 긴급조치 9호를 통해 안보가 유일한 체제 이데올로기로 나서고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민방위기본법, 교육관계법 개정법률(학도호국단) 등 4대 전시법을 단행해 국방비를 확대하고 민간인, 학생들을 군사체제로 재편했다. 다시말해 긴급조치 9호와 이와 관련해 만들어지거나 개정된 법률에 의해 유신체제는 전시총동원체제로 극단화했다. 일종의 "무헌법상황"(민주주의국민연합,[10.17민주국민선언], 1978)을 초래한 것이다. 전시안보체제와 극단적인 독재권력이 맞물린 긴급조치 9호의 시대는 유신의 몰락 때가지 이어졌다.
4. 유신체제 하 인권탄압의 특징
유신체제 아래 자행된 인권탄압의 실상은 장기간에 걸쳐 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개별 사례를 분석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을 정도이다. 여기서는 1970년대 양심수 구속.구류 사례만을 대상으로 통계적 차원에서 인권탄압의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1970년부터 1979년까지 양심수의 총계와 관련 법조항 그리고 직업별 분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법규와 구속(구류)자 수 국가보안법.반공법 261명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72명 공무집행방해및폭행 38명 / 국가보위법.노동법 46명 게엄포고령 53명 / 내란죄 8명 방화죄 9명 / 경범죄처벌법 1,184명 긴급조치 1호 48명 / 긴급조치 4호 142명 긴급조치 9호 580명 / 소요죄 108명 기타.미상 155명 양심수의 직업 학생.청년 1,197명 / 노동.농업242명 / 성직자 82명 종교단체종사자 50명 / 언론인.문인 84명 / 교직 52명 정치인 70명 / 회사원.연구원 33명 / 군인.공무원 5명 상업.사업 35명 / 무직 25명 기타 6명 / 미상 805명 * 구류자는 일괄 경범죄로 분류. '기타'에는 범인은닉죄, 선거법 등 위반, ' 미상'은 적용법률이 불명확한 경우. 1979년 구류자가 많은 것은 '부마민중항쟁' 때문임. 1) 학원과 학생운동에 대한 인권 유린.(학원 사찰, 학교의 병영화, 학교의 교육 재량권 박탈) 2)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에 대한 생존권 압살과 이에 대한 저항(전태일분신사건, 카톨릭농민화와 도시산업선교회 탄압, 광주대단지'폭동'사건, 철거민투쟁) 3) 정치권과 정적에 대한 탄압(김영삼의원 초산테러, 긴대중납치, 공화당 항명파동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개입) 4) 언론 탄압(동아일보 광고 탄압,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탄압, 검열) 5) 문화 예술에 대한 탄압(사전심의제도, 판금조치, 문인간첩단 사건, ) 6) 종교계 탄압 7) 유학생간첩단 사건과 외국인 성직자 추방 등 국내법의 자의적인 적용 8) 안보, 반공이란 차원에서 반국가사범의 조작 9)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침해(필화사건) 10년 동안 양심수의 총수는 2,704명(그 중 1,184명은 구류)으로 매년 270명 내외가 유신체제의 제물이 되었다. 여기에 훈방 조처나 수사과정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의 숫자를 포함하자면 유신체제의 희생자와 인권 유린사례를 고려하면 그 수는 대폭 늘 것이다.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 해도 모두 1천 2백 4명에 달한다. 여기에 일반 범죄사범이나 우리 사회에서 경찰 등에 의해 행해진 공공연한 인권유린사례를 포함하자면 통계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통계를 통해서 볼 때 한마디로 박정희 유신체제의 "전반적인 탄압"과 이에 대한 각계 각층의 전반적인 저항이라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학생과 노동자 농민의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은 민주화 문제 뿐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문제가 절박한 인권문제로 제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인권 탄압이 탈법, 비법, 불법 뿐아니라 다양한 반국가사범에 관한 처벌규정과 연동되어 자행됨으로써 인권탄압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특히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은 일제시기 악법의 연장으로 인권유린의 최고공격수 역할이자 반공주의에 의한 마녀사냥의 도구로 기능했다.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반공법을 적절하게 비판했다. "반공법 제4조의 상투적, 경강부회적, 무차별적, 모략적 적응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사상적,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빼앗아 온 최대의 질곡이며 우리 민중으로부터 '말의 자유'를 빼앗아 숨막히는 암흑과 침묵의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부패특권의 압제권력을 유지해 온 최대의 억압의 무기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가지 치떨리는 분노로 항의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성의 허용,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온몸으로 요구한다."(김지하,[양심선언], 1975.5.4) 세 번째로 인권탄압은 다양한 국가기구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특히 중앙정보부는 국가테러리즘의 상징이었다. 중앙정부부는 공포정치를 펴면서 한층 더 강화된 극우반공주의.반북한주의를 기반으로 '군사문화'를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고루 전파시킴으로써 한국 사회 전반에 반민주주의적 독소를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경찰, 군수사기관 등 각종 기관들이 인권유린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한국 사회는 상층의 정치구조가 바뀌어도 하부의 인권유린은 발본색원되기 어려울 정도로 인권유린의 구조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네 번째로 박정희의 인권유린은 기본적으로 ""직접적으로 한국 국민에 대한 완전한 독재적 전체주의적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박대통령의 일관된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데 있"었다.(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버틀러보고서] 1974년 7월) 때문에 인권운동 또한 포괄적인 반체제운동과 결합되어 전개될 수박에 없었고, 그런 연유로 인권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일종의 지하투쟁이었던 셈이다. 다섯 번째로 박정희정권은 다양한 관제행사에 국민, 특히 지식인을 동원해 체제 찬양을 강요했다. 저항이 아니라 침묵할 자유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정권의 인권유린은 체제 도전에 대한 방어적 성격을 넘어 유신을 위해 순교를 강요하는 공격적 인권유린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정권의 인권탄압은 고문과 폭력, 특히 고문을 통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고문은 "'법과 폭력'이란 상반된 제도와 힘의 야합"이 만들어 낸 것으로, 고문은 고문당하는 사람뿐 아니라 고문하는 사람까지 인간성을 파괴시킨다. 5세기 경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문 폐지를 주장하면서 고문당하는 사람은 "그가 범죄를 저질렀기 대문이 아니라 범행 여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고문의 괴로움을 당한다"고 고문의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고문을 당해서 죽는 경우 이는 사형선고를 받지 않고도 사형되는 셈이며, 그가 정말 죄인인지 아닌지 그 누구도 알 지 못한 채 죽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박정희시기 자행된 고문은 보다 적극적이고 잔혹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유신시대의 고문은 범죄 사실을 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만들기 위해 권력자와 그 하수인의 의도대로 각본을 짜기 위한 강제도구로 작용했다. 여기에는 일제시기의 고문기술과 한 사회가 이룩해놓은 과학.기술까지 총동원되었으며, 국가공무원이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국가의 범죄였다. 아울러 고문에 대한 공포를 사회에 만연시켜 "저항하는 자에게는 고문이"이라는 극도의 공포감을 확산했다. 고문은 피해당사자를 포함해 익명의 국민 개개인 또한 폭력 앞에 떨어야하는 동물적 존재로 만들려고 기도했다. 고문의 방법도 극악해 물고문, 전기고문, 수면방해, 구타, 천장에 거구로 매달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넣어 비틀기, 겨울에 옷을 발가벗기고 찬물에 집어넣기, 불이나 담배불로 지지기, 비녀꽂기, 통닭구이, 강간.윤간.기타 성고문, 물속에 머리 처박기,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기, 원산폭격, 빈대붙기, 칠성판에 묶고 구타하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사건들 경우에는 고문문제가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범죄, 그리고 이른바 공안사건의 경우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알려지더라도 인권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인권의 불평등" 현상이 두드러졌다.
5. 박정희정권의 인권탄압의 부정적 유산
박정희정권의 인권탄압은 역설적이게도 197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인권'이라는 말과 그 개념이 역으로 대중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런 순교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순교의 피는 박정희체제가 무너진 이후에도 아직 그치지 않고 있으며, 인권분야의 사회적 성숙도 아직은 낮은 수준이다. 박정희에 의해 완성된 국가테러리즘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 후진성을 구조화시켰다 박정권이 국가를 정점으로 개인을 국가기관, 준관변단체를 통해 통제한 시스템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국가 차원에서는 민주주의를 표방해도 개인이 실제 몸담고 있는 직장, 학교, 생활공간과 구가기구의 다양한 하부조직 그리고 관제단체들은 때로는 반공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총화와 단결이란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체 차원에서 전교조의 활동은 '보장'되어도 실제 단위 학교 차원에서 전교조 지부의 할동은 전혀 보장되지 못한다. 일상 속에 파시즘과 그 구체적 형태인 인권유린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또 국가테러리즘은 그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을 미화할 수 밖에 없다. 폭력의 주범들은 자신을 반공투사, 조국중흥의 주체, 민족의 지도자,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분식하면서 한 세대 이상의 국민들에게 이를 받아들이도록 역사를 왜곡하고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그가 구축한 제도교육과 관변단체 그리고 국정교과서 등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박정희신드롬도 유신체제의 전면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흡수당한 '박정희 향수세대'와 박정희정권의 인권탄압 실상을 모른 채 현재 외형적인 물질적 성장만을 박정희와 연관시키는 젊은 세대가 교육을 통해 알게 모르게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왜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나
- 박정희와 박정희기념사업에 대한 연구소의 공식 입장 -
민족문제연구소
*** 두 가지가 잘못된 박정희 기념사업
김대중정부는 700억 원이 소요되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에 200억원을 국고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가을 정기국회에 특별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나머지 500억원은 민간 모금으로 메운다고 한다. 이 뿐 아니다. 정부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부근 공원의 5,000평을 기념관 터로 무상제공하기로 했다. 박정희 기념관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내력이야 어떠하든, 2002년 월드컵 관광객에겐 축구경기 외에 또 하나 눈요기감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처럼 박정희 기념관은 역사명소이자 관광지로 자리잡게 될 것인가? 박정희 기념관은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물론 박정희를 찬양하거나 미화하려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하며, 이들은 박정희를 '기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 정부 또한 화해와 용서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지역 감정의 해소를 위해 그리고 대통령이 공약한 사안이라는 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 기념관 건립사업에 정부가 나선 까닭을 변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각자 처한 위치가 다를지라도 다양한 동기와 이해 관계 속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일치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기념관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결코 추진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박정희는 우리가 기념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정희는 21세기로 나아가면서 우리가 청산해야 할 20세기의 낡은 유산이다. 박정희의 일생과 삶의 방식 그리고 그가 현대사에 끼친 악영향을 보자면 박정희는 역사의 '반면교사'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박정희가 우리 역사에 끼친 부정적 영향을 우리가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과 다름없다. 국민 대다수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국고를 지원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어떤 형식이든 박정희 기념관 자체가 거부되어야 한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이 부당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사업을 추진하는 동기가 대단히 불순할 뿐 아니라 역사를 또한번 왜곡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라는 민간 기구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인데, 굳이 정부가 이 사업에 앞장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국민의 정부, 인권대통령이라 자처하는 김대중대통령이 스스로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을 맡아 이 일에 앞장설만큼 어떤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일 현 정권이 박정희를 기념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반대급부를 노리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기만하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사태는 비관으로 흐르고 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에 정부가 나서고 야당이 지지하는 현재의 분위기를 볼 때 박정희 기념관은 예정대로 건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대다수 국민이 한결같이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만이 이 불행한 사업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 검토함으로써 박정희가 왜 기념 아닌 청산의 대상인지 명확하게 해명하고, 현재 진행되는 기념관 건립사업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널리 밝힐 필요가 있다
*** 박정희를 옹호하는 논리들
박정희를 옹호하는 근거 가운데 크게 논란이 되거나 주요한 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박정희는 친일파라고 하지만 그 친일 행위는 미미하다. 그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것은 해방 직전 1,2년에 불과하며 실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참가한 적도 없다.(어떤 이들은 이 시기 박정희는 광복군과 연결되어 독립운동을 모색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방 후 한 때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담했지만, 특무대에 체포된 후 박정희가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고백함으로써 군부 내 좌익세력을 발본색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박정희의 일생에서 친일 또는 좌익전력은 극히 일부분의 시기에 국한되며, 이후 그가 끼친 역사적 공로를 볼 때 사실 무시해도 무방하다.
2. 4 19 이후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민주당은 무능했다. 더욱이 혁신계 세력이 급진적인 통일운동을 전개해 적화통일의 위험마저 있었다.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회는 더욱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박정희의 쿠테타는 그 형식이야 어떠하든 '사회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3. 박정희 유신체제는 후진국(또는 제3세계) 근대화(혁명)의 한 유형으로 파악해야 한다. 후발국가에서 근대화를 빠르게 이룩하기 위해 지도자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비록 인권문제는 소홀했지만 박정희는 '빵문제'를 해결하고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은 일종의 고도성장의 착수금을 확보하는 과정이었이며, 박정희의 이러한 정책 결단은 현실적이며 올바른 것이었다. 박정희 집권기는 '위대한 조국근대화의 시기'로 재조명해야 한다.
4. 역대 정권 가운데 박정희 정권만큼 민족주의적인 정권은 없었다. 박정희는 민족주체성과 민족정기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주한 미군 철수나 독자 핵개발를 추진했다. 아마 박정희는 독자 핵개발이 성공했으면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의 죽음을 당해 종신독재자의 오명을 써야 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상당 부분 기초적인 역사 사실을 왜곡하거나 그 근거가 대부분 박약하다. 이들이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는 '조국근대화 신화' 또한 박정희 시기 우리 경제를 과대평가하거나 잘못된 가치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들은 박정희 집권기에 시행된 여러 정책을 그 전후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떼어내어 자의적으로 미화하고 있다. 마치 병들어 죽어가는 환자의 몸을 분리시켜 이 가운데 손가락, 발가락은 싱싱하니 결국 전체 몸도 싱싱하다는 식으로 견강부회, 침소봉대하고 있다. 심하게는 이들은 민주사회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가치관까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논리로 동원하기도 한다. 이제 이들의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 왜 우리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정희의 친일 전력은 그 동기나 행위 면에서 동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그의 말을 빌리자면 "큰 칼을 차고 싶어"--스스로 일본제국 장교의 길을 택했다. 가난, 무지, 만용, 징병 등의 이유로 일본군에 들어간 것과 다른 자발적 친일의 전형이라 하겠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1944년 만주군 제5관구 예하 보병 8단에 배속받은 박정희는 그곳에서 조선인`중국인 항일빨치산을 적으로 삼고 싸웠다. 그가 실제 전투에 참여해 몇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살상했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항일독립운동세력을 적으로 삼는 제국군인의 임무를 충실히 다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정희가 이 시기 광복군의 비밀조직과 연결되었다는 소문 또한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 그의 충성세력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박정희는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박정희는 일제 패망 때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체화시킨 최후의 제국군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박정희의 전력을 두고 그가 중위로 제대했기 때문에 친일혐의가 미미하다거나, 또는 극히 짧은 '젊은 날의 방황'으로 변호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그가 거물 친일파로 성장하기에는 일본의 패망이 너무 일찍 찾아왔을 뿐이다. 특히 박정희가 일본 파시즘의 꽃이라 할 제국군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대통령 박정희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그리고 통치 형태에는 이 시기 그가 체득한 일본파시즘의 논리가 깊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했다. 극우주의에서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유사시에 군부 내 좌익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전개할 임무를 받았으나, 여순사건을 전후해 김창룡이 이끄는 육군 특무대에 발각 검거되었다. 박정희는 군부 내의 좌익 명단을 제공하는 대가로 목숨을 부지했으며, 군부 내 좌익은 박정희의 자백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가치관을 떠나서 보자면 박정희는 숱한 동료의 목숨을 판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군문을 떠난 박정희는 6`25전쟁을 계기로 군에 복귀했다. 그리고 5`16쿠테타를 통해 마침내 권력을 장악했다. 이 때 박정희가 내세운 혁명공약 제1조는 "반공을 국시로 한다"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에서 공산주의자로 그리고 다시 반공 극우주의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끝없는 변신에는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개인의 생존 본능과 권력욕 만이 유일한 동기였다 할 수 있다.
한편 5`16쿠테타는 결코 그 주역들이 말하는 주관적인 "구국의 일념"과 거리가 멀었다. 이미 박정희는 4`19가 일어나기 전 세 번이나 쿠테타를 준비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사정이 뜻대로 되지 않아 쿠테타를 결행하지 못하다가 4`19를 맞이했고, 4`19 이후 이른바 혼란정국을 틈타 쿠테타를 통한 군사통치의 서막을 열었다.
그런데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4`19 이후 정국 혼란이 일시 있기는 했지만 점차 사회질서가 잡혀가고 있어 군사쿠테타를 결행할 명분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사회가 혼란하다고 해서 군인이 쿠테타에 나서야 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오히려 박정희는 쿠테타를 거듭 모의하다 정부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다. 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쿠테타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켰을 뿐이다. 5 16은 "역사의 필연"이 아니었다.
문제는 박정희는 군부쿠테타(군의 정치 개입)를 전혀 부당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군국파시즘 아래에서 청년 장교로 지낸 박정희는 메이지유신과 소와유신을 매우 높게 평가했으며, 그 자신이 군국파시즘의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정당정치와 대중의 다양한 여론을 사회 혼란으로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국가의 '적'으로 설정한 일본 우익의 사고방식은 박정희의 그것과 동일했다. 사회혼란을 군부가 일시에 제거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중심으로 국가를 개조한다는 군국파시즘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 5`16군사쿠테타였다.
박정희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6`25전쟁 이후 국민 사이에 높아진 냉전 의식과 자신의 좌익 혐의의 불식 그리고 남한을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드려는 미국의 의도가 맞물리면서 등장한 것이다. 박정희의 반공은 쿠테타의 명분이자 정략적인 것이며 그 바탕에는 파시즘과 메이지유신의 환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애초부터 "국시 반공" 안에는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었다. 민주주의는 사회 혼란과 북한의 적화통일을 가져올 '남한 자멸의 요소'로 파악되고 있었다. 5 16쿠테타는 이미 유신쿠테타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 유신체제 : 총체적 후진성의 구조화
20년 가까이 유지된 박정희 지배체제는 유신체제를 통해 그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었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유신체제가 불가피했다든가, 유신체제가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고도성장을 마련한 박정희의 '경제치적'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하게는 유신체제를 한국 민족주의의 발로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독재정치란 것은 하나의 상식이므로, 여기서는 유신체제가 어떤 속성을 지녔으며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하겠다.
10월유신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박정희가 남북통일을 악용해 영구집권을 꿈꾼 제2의 쿠테타였다.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국민들에게 통일의 환상을 불러일으킨 후 통일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유신을 선포했다. 그러나 10월유신은 평화통일을 앞당기기는 커녕 오히려 남북의 냉전구조만 강화했고, 총력안보란 구실 아래 유래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유신체제는 1930년대 일본 파시즘의 지배원리와 '근대화론'을 접합시킨 '일본파시즘의 한국적 변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신(維新)이란 용어 자체가 일본의 메이지유신, 소와유신에서 따온 것이며, 유신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구조와 통치체제의 근본 원리 그리고 수많은 정책들이 일본 파시즘의 그것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반상회(班常會)'는 조선인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애국반'이,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는 천황의 "교육칙어'와 "황국신민의 서사'가 연상될 만큼 그 연결이 자연스럽다. 박정희가 주창한 총력안보체제와 학도호국단과 교련 그리고 극단적 배외주의 또한 일제 파시즘의 정책과 동일했다.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지도자 양성책은 일제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 신촌(新村)운동과 농촌 중견인물 양성책에서 시사를 받은 것이었다.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극단화시켜 국가주의적 전시통제체제를 강화하고 이를 개인의 권력 강화로 귀결시키는 유신체제에는 파시즘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통해 우리 사회를 통치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병영국가로 재편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아의 확립 대신 국가(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을 오로지 요구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이어주는 명령계통의 국가기구와 어용단체만 존재했을 뿐,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가차없는 박해만 따를 뿐이었다. 박정희시대에 '시민'아닌 '재야'라는 독특한 저항진영이 형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4`19 이후 막 피어나던 우리의 시민사회는 태어나기도 전에 박정희 국가주의에 의해 태아살해된 것이다.
물론 유신체제가 일본 파시즘을 모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본 파시즘과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유신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구조와 통치의 근본 원리 그리고 여러 정책이 일본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남한사회가 다시 제국군인출신의 대통령에 의해 일본 파시즘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조국근대화'의 원리로 강요당했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였는가
박정희의 반미감정 또는 핵개발로 대표되는 자주국방론을 두고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것도 이만저만 곡해가 아니다. 박정희가 미국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 16쿠테타 이후 박정희는 미국의 쿠테타 승인과 각종 지원을 얻기 위해 출발부터 미국의 대외노선과 지도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가 미국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터뜨린 시점은 유신체제가 등장하면서였다. 자신이 영구 집권으로 가려는 길목에서 이를 문제삼는 미국의 간섭이 거세어지자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제3세계의 반미주의나 고전적인 민족주의와는 그 동기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설령 그가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국가주의가 유신체제를 받치고 있는 한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반동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화통일 그리고 자주권의 회복과 민중 주체의 사회 발전을 주장한 진보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유신체제의 정반대편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박정희가 "민족주체성을 함양"한다고 미풍양속 부흥, 특히 충효사상을 들고 나온 것도 민족주의 또는 민족문화와 무관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가부장적 유교이념을 천황제 파시즘으로 연결시켰듯이, 박정희 또한 봉건적 충효사상 등 중세의 유령을 전통문화, 미풍양속이란 이름으로 부활시켜 국민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일본 제국주의 대신 박정희가 주체로 등장했을 뿐 그 문화적 속성은 일본 파시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박정희와 그 이데올로그들은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고 부르면서 그 정당성을 우리 역사 속에서 끌어내기 위해 수많은 전통을 고안하고 찬미했다. 이 또한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민족문화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예를 들어 화백회의와 정사암제도와 같은 만장일치제의 귀족합좌회의는 일인 후보에 대한 찬반을 묻고 백 퍼센트 가까운 지지로 선출되는 "체육관 대통령"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각광받았다. 박정희가 추구한 전통은 대개 이런 따위였다.
박정희의 대중문화정책은 검열과 규제를 앞세운 처벌주의였으며 그 기준 또한 작의적이었다. 일례로 우리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아침이슬"이나 "행복의 나라로"와 같은 노래는 가차없이 금지 처분을 받았다. 앞의 노래는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가사의 "붉은"이라는 단어가 용공의 혐의를 받은 것이다. 뒤의 노래는 지금 대한민국이 행복한데 여길 두고 또 어떤 행복의 나라를 찾아간다는 심산이냐는 지배층의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박정희 시기 시작된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은 가부장제 획일주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경찰이 자와 가위를 들고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박정희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미국의 버릇없는 젊은이의 못된 문화라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조건 배척하고 자신을 기준으로 한 사회의 문화적 내용을 전단하려는 문화적 독단을 민족문화의 보호육성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곤란하다. 결국 그가 용인한 것은 자신이 익숙했던 유교 가부장제와 파시즘 문화였다.
유신체제는 당대에만 악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각종 관변단체 특히 제도화된 장치를 통해 자라나는 세대마저 파시즘형 인간으로 훈육하려고 했다. 규율과 복종정신의 내면화를 통해 민주적으로 훈련받아야 할 학생층은 정반대의 길을 강요받았다. 그가 만든 각종 유신체제의 보조 기구는 박정희가 사라진 지금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아 일상 속의 파시즘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아직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 개발독재의 어두운 그림자
박정희가 걸어온 길이 이렇듯 뚜렷하게 부정적이기에 그의 추종자들 조차 박정희의 공로로 자신있게 드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이었다. 필자 또한 어찌되었건 박정희 집권기에 뚜렷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동의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내용과 질을 따져보면 성장의 그래프보다 더욱 깊게 그 부작용과 후유증이 남겨져 있다. 쟁점이 되는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부 학자들은 박정권이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워 한일협정을 맺은 것을 잘한 일이라고 추켜 세운다. 이 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느냐고 이들은 반문한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박정권이 한일회담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권이 한일회담을 '잘못된 시각'에서 시작했고, 이들의 부도덕하고 무능한 외교로 말미암아 한일협정은 '차라리 추진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문제삼는 것이다.
박정권이 일본정부로부터 제공받은 유무상 5억달러의 청구권 자금은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 우리가 겪은 피해에 비하면 극히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게다가 박정권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범죄와 민중의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도 묻지 않은 채 36년의 피해보상을 서둘러 매듭지었다. 그 결과 '정신대' 문제, 원폭피해자, 재일동포 지위 등 일제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가 한 가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한일회담을 이렇게 졸속으로 추진한 근본 원인은 쿠테타 이후 볼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정권의 무능함을 일본의 경제 지원으로 메꾸려는 조급함과 정권 담당자가 지녀야 할 역사의식의 부재에 있었다. 사실 한일회담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제대로 못받았으니 무책임외교, 무능력 외교의 본보기로 지적되어야 한다. 게다가 한일협정을 전후해 일본으로부터 거액이 공화당창당자금의 뒷돈으로 제공되었다는 의혹은 도덕성의 시비마저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편 한일회담은 한국, 일본, 대만을 연결해 동아시아 반공라인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떠밀려 더욱 급하게 추진되었다. 박정권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쿠테타의 합법성을 구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때문에 한일회담은 우리의 내재적 요구와 주체적인 태도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집권 시기 경제성장은 베트남전이라는 또 다른 성장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박정권이 베트남 참전을 결정한 것은 경제개발의 재원을 조달하고 미국의 하위동반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은 프랑스-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100년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려는 베트남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따라서 한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해야 할 명분은 없었다. 식민지의 고통을 겪은 우리가 남의 나라 독립운동에 개입하러 간다는 것도 온당하지 않으며, 젊은이의 피를 대가로 성장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월남전 특수'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고도성장을 논하기 전에 한국 군인과 월남 민중의 피의 희생이 먼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경제성장을 위해 월남파병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면, 일본 우익이 과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것을 일본 경제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얘기하는 제국주의 논리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최근에는 박정희의 치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주목하기도 한다. 새마을운동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농민에게 심어주었으며, 성공적인 농촌개혁운동이었다고 격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이 시기 농촌경제를 살펴보면 새마을운동이 과연 농촌을 살렸는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박정희정권이 몇 몇 성공 사례를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서 그 성과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농가경제의 파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새마을운동은 그 경제적 동기보다는 박정희정권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농촌에게 구하고, 정치적으로 낙후된 농민을 동원 통제하려는 보다 거시적인 통치전략 측면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일제시기 농촌진흥운동이나 신촌운동 그리고 농촌중견인물양성책이 그러했듯이, 새마을 운동 자체가 갖는 대내외의 거대한 정치적 선전`동원기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론은 국가가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해 경제의 틀을 짜고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어 이를 육성 지원하는, 국가주도 재벌 중심의 수출지상주의였다.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강력한 권력이 독재를 행사하는 것도 정당화되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휴유증은 엄청났다. 재벌의 정경유착과 부실경영, 한국경제의 미일의존성, 부와 소득의 불균형, 농업의 희생, 노동자들의 인간적 권리 말살, 만성적인 외채경제는 박정희가 주조한 경제구조의 핵심이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
박정희식 경제개발론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보와 경제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를 위해 인간의 모든 가치가 유보될 수 있다고 주장해, 인간을 오직 빵으로만 사는 동물적 존재로 돌려버렸다. 박정희가 민주화를 훼손시켰지만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좋다는 전도된 가치관으로 연결된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러한 전도된 가치관에 입각해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쿠테타를 하고 유신체제를 선포했다는 식으로 그를 억지미화하고 있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인정이 있고 이웃이 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향수, 저마다 소중한 추억을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바꿀수는 없다. 오직 '대망의 80년대'만을 기다리며 초인적인 인내력과 헌신적인 노동으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 온 박정희시대의 민중들에게 조촐한 술 한상을 차리지 못할 망정 그 가운데 호의호식하던 박정희를 기리다니 말이 되는가.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결코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없으며, 박정희의 고도성장을 찬양하기 전에 그 깃발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희생자에 대한 경의와 명예회복이 앞서야 할 것이다.
*** 결론 : 박정희기념관 건립 반대투쟁의 역사적 의미
박정희가 집권한 시대는 민족과 반민족, 민주와 독재, 그리고 통일과 반통일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치관이 투쟁하던 시대였다. 이 빛과 그림자의 투쟁에서 박정희는 언제나 반민족으로, 독재로 그리고 반통일의 화신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이 암흑의 지배 아래 수많은 친일잔재와 파쇼 세력이 기만적인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때로는 '박정희 신도'로 자처하면서 박쥐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박정희 집권기 구축된 권력집단이 자신의 기득권을 21세기까지 연장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상징화 작업이 바로 박정희 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은 자신의 허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보수세력을 끌어들이고자 이 기념사업에 적극 뛰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기념관 건립사업은 박정희 시기 그의 '공범'들과 박정희가 남겨놓은 관변 시스템에 유착한 세력 그리고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현 집권층의 권력욕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의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 엉키어 진행되는 추악한 권력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인권대통령으로 자처하는 김대중대통령이 이 사업에 적극 나서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대통령은 자신을 가해한 박정희를 "이미 용서"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지나 개인의 자격에서 가능할 뿐이다. 문제는 박정희는 김대중대통령의 '개인적 박해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한 시대 국민을 볼모로 삼은 역사의 죄인이랄 수 있다. 이런 박정희를 김대중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역사와 국민을 대표해 임의로 용서하고 게다가 기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속에 국민의 혈세 200억원을 박정희 기념사업에 바치는 것은 이만저만 월권이 아니다. 알량한 정권 재창출을 위해 한편으로 박정희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가해자를 기념하는 이 엄청난 역사의 기만을 어찌 두고만 볼 것인가.
박정희는 결코 기념할 대상이 아니다.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독재로 이어진 오욕의 20세기를 극복하고 21세기 민족의 새지평을 열기 위해 반드시 극복 청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더욱이 박정희는 2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면서 각종 국가기구와 관변단체를 통해 이른바 박정희이데올로기라는 파쇼적 가치관을 국민 속에 감염시켰다. 이제는 올바른 역사 반성을 통해 다시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우리의 가치관을 바로잡는 것이 시급하다. 지금은 박정희 기념사업이 아니라 박정희 청산사업이 시작될 때이다. 우리가 한 시대의 역사를 바르게 규정하지 못함으로써 전도된 가치관이 횡행하게 되면 언제든지 제2, 제3의 박정희 기념사업과 그의 후예들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화(共和)의 뜻(최원식/인하대 교수)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정책협의회를 구성하자는 민주노동당의 제안을 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수용하였다는 보도가 나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나쁘지 않은 정치뉴스다. 진흙밭의 싸움개들 모양, 줄기차게 공방을 계속하며 국민들을 짜증나게 하던 우리 정치가 이제 좀 본령으로 돌아가려는가? 국민을 염려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국민의 염려를 받는 꼴에서 벗어날 일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슬그머니 솟는다.
<분열의 치유는 공화(共和)의 정신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구절은 우리나라의 국체(國體)와 정체(政體)를 뚜렷이 밝힌 헌법 제1장 제1조다. 민주화가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하는 불행한 사태가 거의 불가능해진 이제, 공화국의 뜻을 다시 새길 때가 되었다. 인민 또는 국민에 주권을 두는 민주주의는 파당의 정치로 타락할 위험을 항시 지니고 있다.
정당을 뜻하는 party가 부분을 의미하는 part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정당정치란 본디 왕년의 당쟁(黨爭)과 그리 먼 곳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 정당이 보스 중심으로 운영됨으로써 근대적 제도로서 잘 연마되지 못한 한국에서는 그런 성격이 더욱 심했던 터다.
노무현정부의 출현은 바로 5.16 이후 무려 반세기 동안 고착된 무쇠뚜껑을 열어버린 사건이다. 박정희·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보스정치의 총퇴장 이후 한국사회는 맘껏 자유를 구가하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상태로 급속히 빠져들었던 것이다.
이 분열을 치유할 길은 공화에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공화는 이중으로 기피되었다. 북한의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공화국’ 또는 ‘인공’으로 약칭되곤 해서 내면화한 반북정서가 공화에 대한 천착을 지연시킨다.
그런데 공화당으로 약칭되곤 한 한국의 민주공화당도 한몫 거든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4월혁명을 추억으로 격하하면서 강력한 군부통치를 편 박정희독재와 한몸을 이룬 민주공화당의 망령이 역시 한국에서 공화라는 말에 대한 간과를 부추긴다.
그뿐인가. 미국의 공화당이 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함으로써 한반도와 그 주변을 유동성의 위기로 몰아가는 부시 공화당정부는 한반도 평화구축에 결정적 이정표를 세운 6.15선언을 휴지로 만들고 싶어한다. 한국정부를 윽박지르며 노골적인 반북한 캠페인을 벌이는 부시정부 때문에 최근 한국에서 공화라는 말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공화국’ 북한이란 존재와, 한때 막강했던 또는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한국과 미국의 공화당들이 던지는 껄끄러운 이미지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공화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켜 왔던 것이다.
<공화의 토대는 공공선에의 충성>
민주화의 과실로 심화되는 평등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이기주의에 기초한 파당주의로만 치닫는 이 사태를 치유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예전의 독재 또는 보스정치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분파성을 극복하고 공공선에 대한 충성을 토대로 국민을 다시 통합하는 공화의 정신을 재건하는 것이 관건이다.
공화국을 지칭하는 republic은 공공적인 것을 뜻하는 public에서 유래했다.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핵으로 삼는 공화국이란 분화의 연쇄를 무한대로 이끌 수도 있는 민주주의를 구원한다.
공화는 근본으로는 서구적이지만 전통의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주공(周公)의 정치가 실은 공화였다. 강력한 주 무왕이 죽자 어린 성왕(成王)이 등극했다. 무왕의 아우 주공은 이 어린 임금을 보필하여 주나라 문물제도를 문명의 표준으로 개화시켰다.
그런데 주공의 정치는 전제적이지 않았다. 주공의 정치를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인물이 역시 무왕의 아우인 소공(召公)이다. 주공과 소공의 협치(協治)를 일러 공화라고 불렀으니, 이는 단지 주공과 소공의 공화가 아니라, 왕과 귀족, 귀족과 인민, 그리고 인민과 인민 사이의 공화를 총체적으로 대변했던 것이다.
모쪼록 정책협의회의 구성이 나라 안팎의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할 국민통합의 기관차 즉 공화의 원리를 새롭게 실현하는 창조적인 시험실로 자리잡기를 기원한다.
글쓴이 / 최원식
인하대 문과대 학장 / 국어국문학 교수
서울대 국문학박사
민족문학사학회 공동대표
한국동북아지식연대(NAIS Korea) 공동대표
저서 : 한국의 민족문학론
한국 근대소설사론
출처 다산연구소(www.edasan.org)